환상회랑 : 꽃을 틔우라(Esha moinyrn)

  “이봐, 거기 동정남.”

  헤스 엔버는 27살의, 방금 전 지적받은 것과 같이 동정인 남성이다. 하지만 평소에는 그런 티가 나지 않을거라고 스스로 자신할 정도로 준수한 남자였다. 대체 어떤 예리한 눈을 가진 아가씨기에 이런 되먹지못한 말을 벙긋하나 한 헤스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예상대로,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헤스는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렸다.
  ‘당연하지, 여긴 사율산맥 한가운데라고.’
  귀신은 머릿속에서 말을 걸기 때문에 자기가 모르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동정이라는 사실은 헤스 말고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환청으로 생각하는 게 당연할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사율 산맥 한가운데서 자기 목소리가 아닌 목소리를 들었다면 누가 있다고 생각하기보다 환청으로 판단하는 편이 현실적이니까.
  “무시하지 말고, 지금 길 헤매고 있지 않아?”
  헤스는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아무도 없다. 헤스는 눈을 찡그리고 그 자리를 노려보았다. 누군가 나타나길 기다리기보다 지금 제정신을 잃어가고 있는 자기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걸었다고 환청에 빠지다니, 제정신이 아니구나. 헤스. 마찬가지로 귀신은 자신이 아는 것 외에는 말 걸지 않았다.
  다시 움직이려 할 때, 짜증 섞인 소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거참 말 안 듣는 꼬맹이로군. 그쪽으로 가면 눈구덩이가 있어. 가면 빠져 죽어.”
  헤스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목소리가 들린 쪽을 주시하다가 그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는 지팡이를 휙휙 저어 잔가지와 눈덩이들을 파헤치고 휘저었다. 얼마 젓지 않아서 바위 위에 그가 찾던 것이 드러났다. 아니, 스스로 나타났다고 하는 편이 옳겠다. 방금전 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것이었으니까. 헤스는 중얼거렸다.
  “멸론화.”
  “와, 한눈에 알아보네? 그래, 너희 중 몇몇은 그렇게 부른다더라. 하지만……”
  “무슨 장난질을 하는 거냐, 꽃귀신 같으니.”
  헤스가 말을 대뜸 자르고 따지자 꽃은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그 목소리라는 것은 헤스를 매우 혼란스럽게 했는데, 그 소리라는 것은 꽃이 아닌 사율산맥의 혹풍을 여자의 성대에 통과시켜 조각해낸 것처럼 허공에서 들려왔다.
  “장난이라니, 난 지금 발견되는 귀찮음을 감수하고 모습을 드러냈다고. 지팡이에 내 귀한 잎대가 꺾이기 전에 말이야. 그리고 꽃귀신이든 멸론화든 그런 이름 대신…….”
  “난 시간이 없어. 북쪽으로 가야해.”
  “북쪽? 거긴 아무것도 없어.”
  “그건 네가 상관할 바가 아냐. 아냐… 아니지. 너라면 내 미래를 볼 수 있지 않나? 그러면 그렇게 지껄일 이유가 없을텐데. 용무가 궁금 한 거라면 후딱 보고 보내라고.”
  “네 하찮은 미래쯤은 이미 봤어. 하지만 거기에는 네가 저 빌어먹을 똥구덩이 눈 속에 파묻혀서 질식사하는 것과 식량이 다 떨어져서 비비적거리다가 동사하는 것, 발을 헛디뎌서 척추가 부러지는 것 외 기타 등등이 있단 말야. 지금 내가 널 불러내서 첫 번째는 피했고, 두 번째는 내 말을 무시하고 그냥 갔을 경우고, 세 번째는 나랑 끝까지 대화한 다음에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을 경우지. 어떤게 맘에 드는데?”
  헤스는 입을 다물었다. 잠깐 이 꽃을 꺾어버리고 갈 길을 재촉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미래를 볼 줄 아는 이 영악한 꽃의 말을 무시하기에는 그의 산길행이 너무나 위험했다. 익숙한 산행이라고는 해도 지금까지 온 건 충분히 운이 작용했다고 봐도 무난할 정도였다. 앞으로는 하이아탄들이 남긴 근거지도 찾기 힘들다.
  “처음에 동정인 녀석과는 함께 하기 싫어서 넘기려고 했는데 두시간이나 헤매는 모습을 보려니 짜증이 나서 불렀어. 너처럼 방향감각이 좋은 녀석은 처음이야. 왜 자꾸 그 구덩이로 가려고 하는거야? 거기에 뭐라도 숨겨놨나?
  “구덩이로 가는게 아냐. 더 북쪽으로 가는거지.”
  “아무것도 없다니까.”
  “있어. 있으니까 가는거고.”
  꽃은 흥, 하는 코웃음(같은 바람소리)을 내면서 잎을 흔들었다. 그러다가 헤스는 문득 그녀(목소리가 소녀니까 이런 호칭을 붙여도 될 것 같다)에게 물었다.
  “네가 본 미래에는 내가 북쪽에서 뭘 볼지에 대해서는 없는건가?”
  “네 미래? ……어, 물론이지. 난 봤어. 그런걸 생각하다니, 터무니없군.”
  그 말에 헤스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터무니없다니? 그게 어디가 터무니 없는거지?”
  “……어, 음. 터무니없으니까 터무니 없는거지. 멍청아. 사율산맥에서 몸 성히 북쪽까지, 그러니까 사율 산맥을 넘어 가겠다는 꿈을 꾸는 것 자체가 멍청한…….”
  그러자 헤스는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꽃은 다소 위축된 듯 수그러들었다.
  “너, 미래를 못 보는건가?”
  그러자 욱한 듯 꽃이 대꾸했다.
  “볼 줄 알아.”
  “그런데 내가 왜 그런 터무니없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거지?”
  “그것 말고 네가 사율산맥을 넘어갈 이유가 없잖아.”
  “내가? 난 그런 계획 따윈 없어. 내가 사율 산맥을 넘어가는 모습이 보였나?”
  “……아냐? 아니, 난 분명 네가 넘어가는 모습을 봤어. 하지만…….”
  꽃은 뜸을 들이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공백이 있어. 네 미래에는.”
  “공백?”
  “그래. 나와 마주친 뒤 네가 내 부탁을 들어주었을 경우에는, 어느 정도는 보이지만 이틀 뒤 정도는 보이지 않아. 하지만 그 시간이 지나고나면 너 혼자 분명 사율 산맥을 넘어가는 모습이 보인단 말이야.”
  “그런 경우가 자주 있나?”
  “항상 있지.”
  “항상?”
  “대상이 사고로 죽으면 그 후의 미래는 공백으로 남아.”
  헤스는 잠시 말없이 꽃을 내려다보았다. 이 꽃은 그 이름처럼 나의 죽음을 말하는건가? 하지만 그녀는 내가 이 산맥을 넘어간다고도 말했다. 보였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정과 결말 사이에 남아있는 공백의 시간이라는 대체 뭘 말하는건지 헤스는 예측하기 힘들었다.
  “내가 네 부탁을 거절했을 경우에는?”
  “죽어.”
  “내가 네 부탁을 거절하고 돌아간다면?”
  “……살겠지만.”
  “좋아, 혹시 내가 네 부탁을 들어줬을 때 어떻게 죽는지 보였나?”
  “아냐. 넌 그냥 중간부터 흐릿하게 사라져. 안개가 낀 것처럼. 고마워.”
  “뭐가?”
  “날 데려가기로 했잖아.”
  “뭐? 내가 언제.”
  “난 미래를 볼 수 있어. 넌 그렇게 할 테니까 어서 하기나 해.”
  헤스는 나참, 하면서도 잠시 이 꽃의 말이 타당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 아이가 진실을 말하는지 아닌지는 차치하고서라도 환각을 만들고 미래를 보는 능력은 분명 탐험을 하는데 분명 도움이 될 것이었다. 게다가 그의 배낭 무게는 꽃 하나 정도 더한다고 무리가 될 수준도 아니었다.
  “좋아, 무슨 부탁이지?”
  “뭐? 이런 멍청한 녀석이 있나. 방금 말했잖아. 넌 날 데려갈거라고.”
  15살에 신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이후로 멍청하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는 헤스는 그녀의 신랄한 말에 심란해졌지만 미래를 볼 수 있는 존재라면 이정도 지적은 용납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닐까 생각했다.
  “좋아, 말하는 꽃. 데려가주지.”
  “그런 촌스러운 호칭으로 부르지 마. 누가 동정 아니랄까봐.”
  헤스는 대체 미래를 볼 줄 아는 꽃이 어떻게 과거에 속하는 동정이란 걸 알게 되는지 알 수 없지만 별로 지적하고픈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적한다면 그의 첫경험이 어떻게 이뤄질지 듣게 될테니. 대신 헤스는 다른 걸 지적했다.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하는데?”
  꽃은 카랑카랑하게 대답했다.
  “에샤 모이니른(Esha moinyrn)이라는 이름이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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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소설쪽이 안습이길래 어떻게든 써서 내려고 했더니
오늘 데이트하고 와서 피곤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