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마당 - 초청 단편
제2회 판타지 갤러리 단편 대회 우승작
초록먼지
by 이빠
1.
지구의 모든 중위도 지방에 1일 주기로 아침이 도래하듯 이곳 고려 평원에 밝은 아침이 찾아왔다. 자연스럽게 고려 평원 북서부에 있는 진이곤 박사의 자택에도 햇빛이 비쳐들었다. 하늘은 매우 맑아서 태양열 전지로 커피를 끓일 수 있을 정도였다.
평소 진이곤 박사는 오늘 같은 아침햇빛에서 상쾌함을 꺼내 쓰는 데 아무런 지장을 느끼지 않았다. 특히 지금처럼 모닝커피와 토스트를 지참하고 전자 신문을 볼 때는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오늘은 그 상쾌함을 꺼내는 과정에 중대한 문제가 발생했다. 어떤 미생물 종(種)에 대한 전자신문 기사 때문이었다.
'Pulvis viridis(Green dust, 초록 먼지)'라고 명명된 이 미생물은 발생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인류 최대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번식 주기가 매우 짧아 수많은 돌연변이가 생기고 유성생식과 무성생식을 동시에 하며 엽록소가 있어 광합성이 가능하고 몸체가 민들레 씨와 비슷한 구조로 되어 있어 날아다닐 수 있는 등의 우수한 형질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요약하자면, 인류와 전쟁을 할 수 있는 종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진이곤 박사가 보기엔 이 종은 실제로 인류와 전쟁을 하는 중이었다.
진이곤 박사의 아침을 구겨놓은 기사도 그 미생물 관련 전쟁 기사였다. 아랍 평원에 그 미생물 군집이 다가왔고 이미 그 지역 주민은 대피했으며 군대가 남아 초록 먼지를 막아보려 했으나 실패하여 아랍 평원이 그 미생물 군집에 점령당했다는 소식 말이다. 아랍 평원의 표면에 드러난 거의 모든 유기물이 그 초록 먼지 군락(群落)에 흡수되리라는 전문가의 전망도 아주 친절하게 붙어있었다.
박사에게도 그게 남 일은 아니었다. 기상청은 이미 수주 이내에 고려 평원 인근으로 초록 먼지 군집(群集)이 지나간다는 예측을 하였다. 평원을 직접적으로 통과할 확률은 낮지만, 정부에서는 그 예측을 보고받자마자 군사부(軍事部) 산하의 예산을 일부 과학부 쪽으로 떼어주면서까지 시급한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그런 상황에서 아랍 평원이 초록 먼지에 넘어간 것이다. 이쯤 되면 초록 먼지가 쉽게 궤멸하더라도 국내에 발생한 혼란 때문에 피해가 커질 것이었다.
그 때문에 과학부 수석 자문의원인 진이곤 박사는 오늘 열리는 초록 먼지 관련 자문 회의에 참석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회의의 전개양상은 뻔했다. 그와 강신우 과학부 장관은 대책 마련에 대한 독촉을 심하게 받을 테고, 군사부에서는 과학부의 무능력함을 주장할 테며, 미봉책밖에 없는 과학부에서는 확실한 대책을 꼭 내놓겠다고 기약 없는 약속만 해댈 것이다.
과학부가 예산을 비효율적으로 쓰는 건 아니었다. 초록 먼지 관련 연구팀은 과학부에서 막대한 예산을 지원받으며, 초록 먼지의 확실한 퇴치법을 발명 - 혹은 발견 - 한 사람에게는 국가에서 커다란 상금을 주겠다고 공언한 상태이니, 과학부에서 할 만한 것은 다 한 셈이었다. 진이곤 박사는 회의에 나가서 다른 과학자들이 방책을 개발할 때까지 독촉의 화살을 대신 맞아주는 것 빼고는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진이곤 박사는 토스트를 다 씹어 넘긴 다음 커피 잔을 정리하며 신문을 덮고 오늘 회의 때 사용할 자료를 보기 시작했다. 그 자료는 연구 성과나 최근 동향 등을 박사가 직접 집약적으로 정리한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내용 자체는 별것이 없었다. 기껏해야 초록 먼지를 퇴치하는데 미사일 요격이 효과적일 수 있다는 등의 - 미사일 자체의 파괴력보다 폭발에 의한 열기와 후폭풍이 효과가 있을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 말 그대로 미봉책만 줄줄이 쓰여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준비할 수 있는 내용은 그것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준비한 부분에서만이라도 완벽하게 대응하자는 마음에서 열심히 자료를 읽었다. 어차피 회의에서 타박을 받는 건 박사도 예상한 일이었다. 그러니 과학부에 미치는 피해라도 줄여보다는 생각으로 회의에서 최선을 다할 것이었다.
수 시간 후, 회의가 시작했다. 회의 시간은 박사에게 악몽이었다. 시련은 박사가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찾아왔다. 회의 초반, 군사부에서 '과학은 독촉한다고 연구가 더 빨리 진행되는 학문이 아님'을 인정하였을 때 박사와 장관은 속으로 크게 기뻐하며 회의가 의외로 호조를 보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군사부에서 금전지원을 확대하겠다고 했을 때는 기쁨을 넘어 난감한 기분까지 들었다. 하지만, 군사부에서 전투준비태세를 해제하고 퇴치 작전 전체를 과학부에 위임하겠다고 했을 때는 망치로 뒤통수를 맞는 것 같았다. 혁명이 조짐을 보이기 때문에 군사부는 거기에 신경 써야 하고 평원으로 진입할 확률도 희박한 초록 먼지는 과학부에서 더 신경 써 주었으면 한다는데, 이건 회의고 뭐고 아무것도 아닌 그냥 일방적인 통고였다. '돈 조금 더 떼어줄 테니 너희가 알아서 처리해라.' 하는 통고 말이다.
그렇게 회의는 끝이 났다. 고려 평원에 있는 대한 민주 공화국에서 어차피 군사부보다 큰 권력집단은 없었기에 박사는 달리 반박이나 저항을 하지 못했다. 박사는 그 '혁명'이란 것을 원망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박사는 회의장에서 나온 후, 미생물 연구소로 이동했다. 그곳 연구원에게서 연구 경과를 듣고 활동을 격려한 후 공항으로 가서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가빈 국제공항에서 미국행 비행기에 탑승하는 것 까지가 오늘 일정이었다. 박사는 서둘렀다.
2.
진우는 혁명가였다. 그가 속해있는 '한민련'이라는 단체는 군사독재의 마수에 빠진 대한 민주 공화국에 민주주의를 돌려주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이며, 그 단체의 일원은 모두 조국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까지 활발한 활동을 하지 못했었다. 그들과 같은 이적단체에 대한 탄압이 심각하게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초록 먼지라는 생물이 전 세계에서 활동을 하게 되자 국군의 관심도 바깥으로 이동했다. 자연스레 이적단체에 대한 수색이나 탐문도 줄어들어서 한민련 상부에서는 이때가 사태를 호전시킬 최고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젊은 그들은 판단이 빨랐다. 전투준비태세가 발령이 되자마자 인질극을 통한 동료의 석방을 계획했으니 말이다.
행동도 마찬가지로 빨랐다. 국외를 통해 탄환을 밀수하며 총기 사용이 가능한 단원을 모집하여 조를 편성하는 일이 1주일 이내로 끝났을 정도였다. 이제 말만 떨어지면 100명에 가까운 무장 병력이 국내 어디로든 출동할 수 있었다. 그 상태에서 작전 수행날짜와 일시가 정해졌다. 8월 2일 오후 4시에 가빈 국제공항을 점거한 후 주요 인사를 억류하여 한민련 수감자를 석방하게 시키고 비행기를 타고 중립국으로 탈출하는 계획이었다. 가빈 국제공항은 이용객이 매우 적은 소규모 공항이었으나 VIP가 많이 이용했기에 진우를 포함한 대원들은 모두 그 계획에 찬동했다.
진우는 한민련 내에 별로 없었던 군필자 대학생으로서 총기류와 탄환을 지급받고 정오에 가빈 국제공항으로 향했다. 작전이 시작하는 시간은 2시였고 그가 동지와 함께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한 시 반이었다. 진우는 공항 인근에 주차한 승합차에 조원과 함께 대기하고 있다가 공항으로 진입하였다.
진입은 의외로 간단했다. 공항을 경비하고 있던 경비회사 직원 무리는 중화기의 공습에 너무 쉽게 쓰려졌다. 이미 한민련 혁명가들은 공항의 경비 상황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비원들은 경보조차 제대로 울리지 못했다. 그렇기에 VIP 실을 점거하려는 조, 방송시설을 점거하려는 조, 관제 시설을 점거하려는 조, 공항 진입로를 점거하려는 조 모두 성공적으로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진우가 속해있는 2조는 간단하게 VIP 실을 점거했다. 주요 인물 몇 명을 보호하기 위한 경호 인력이 있었지만, 공항 경비병과 마찬가지로 무장은 대수롭지 않았고, 한민련 측 사상자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재빨리 인물을 '악랄한 군사독재정부에 협력하는 반민주적 인사'와 '일반인'으로 분리하였다. 그리고 2조 조장은 민주적 원리에 따라 '일반인'들을 모두 공항 바깥쪽으로 석방한 후 남은 반민주적 인질 10명 정도를 공항 내에 분리 수용할 것을 명령하였다.
진우는 분리 수용 과정에서 단독으로 한 사람을 맡게 되었다. 강직하고 깐깐하게 생긴 그 중년 남자는 신분증과 명함을 지참하고 있었기에 한민련에서 쉽게 반민주적 인사로 분류한 사람 중 하나였고, 진우도 쉽게 그 사람이 '대한 민주 공화국 과학부 수석 자문 위원 진이곤'임을 알 수 있었다.
진우는 긴장한 상태에서 그가 반항하지나 않을까 걱정했으나, 그는 진우가 총을 들이대며 위협하자 순순히 지시에 따랐다. 진우는 그를 데리고 공항 4번 승강장으로 이동한 후 포박했다. 그리고 2조 조장의 휴대전화에 순조로움을 알리는 암호를 보냈다. 진우가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자 공항 방송으로 높은 톤의 소음이 흘러나왔다. 방송실을 점거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 신호로 진우는 한민련이 공항을 순조롭게 점령했음을 알았고, 긴장을 거의 완화했다.
진우가 근처에 있던 공항 내 매점에서 - 이미 매점 주인은 점령 과정에서 공항 바깥으로 몰아냈다. - 음료수를 가져다 먹을 여유까지 부릴 무렵, 진이곤 박사가 진우한테 말을 걸었다.
"자네들 목적이 뭔가."
진우가 이곳으로 박사를 억류할 때까지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었고, 화두 자체도 좀 갑작스러워서 진우는 조금 놀랐으나, 잠시 여유를 찾은 후에 쉽게 대답하였다.
"인질 협상으로 교도소에 갇힌 우리 동지를 석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려는 게 뭐기에 이런 일까지 하나."
진우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우리가 목표로 삼는 것은 조국 민주화입니다."
박사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한민련이로구만."
맞는 말이었고, 굳이 답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에 진우는 대답하지 않고 음료를 목으로 넘겼다.
"나를 놔주게."
진우는 바로 답변했다.
"인질 협상으로 교도소에 같인 우리 동료를 석방한 다음, 우리가 모두 외국으로 대피한 후에 반드시 풀어 드리겠습니다."
"지금 놔 주게. 이유 없이 그냥 놔 달라는 건 아니네. 나도 자네들에게도 나 같은 인질이 필요한 건 알고 있어. 하지만, 나한테는 지금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네."
진우는 그 말을 듣고 뒷말을 해 보라는 듯이 박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빈말로는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생각대로 박사는 말을 이었다.
"자네, 초록 먼지를 아나?"
진우는 알았다.
"신문에서 자주 보긴 했습니다."
"그럼 곧 우리나라 근처로 초록 먼지 군락이 지나간다는 것도 알겠군."
진우는 빈 음료수 캔을 버리고는 대답했다.
"압니다. 그런데 그게 당신이랑 뭔 관련이 있습니까?"
"언론에서는 초록 먼지가 상당히 거리를 두고 비켜간다고만 했지만 그건 국민을 안심시키기 위한 기만일세. 초록 먼지가 고려 평원을 지나갈 확률도 있네. 난 대한 민주 공화국 과학부 수석 자문위원으로서 그때를 대비할 원조를 얻기 위해 미국에서 열리는 회담에 꼭 참여해야 해."
진우는 그에 대해 상당히 놀랐다. 하지만, 신념 덕분에 동요하지는 않았다.
"초록 먼지가 우리나라 상공을 지나갈 확률이 높습니까?"
"솔직히 낮네. 일 퍼센트 이하야."
진우는 바로 판단했다.
"저에겐 확률이 1% 정도밖에 안 되는 멸망에 대한 대비보다 조국 민주화가 더 중요합니다. 동지를 석방하고 탈출할 때는 박사님 먼저 풀어드릴 테니 그걸로 만족하십시오."
"급하네. 회담에 참여하려면 현지 시각으로 8월 3일 자정까지 도착해야 하지. 한국 시각으로는 8월 4일 오전 11시고. 바로 내일 모래야."
"말씀드렸다시피 제게는 저에겐 확률 낮은 멸망 대비보다 민주주의가 더 중요합니다."
박사는 화가 나서 반문했다.
"자네는 지금 조국 자체보다 조국 민주화가 더 중요하다고 하려는 건가?"
"당연히 조국과 민주 중 하나를 택하라면 조국을 택하겠습니다. 그렇다고 조국이 민주보다 100배나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진우가 그 말을 끝냈을 때 갑자기 공항 내 방송으로 심한 잡음이 들려왔다. 지금쯤이면 앞 조가 출동한 경찰관과 인질을 놓고 협상을 하고 있겠다고 생각했던 진우는 이빨을 악물었다. 상황이 매우 좋지 않을 때 방송하기로 한 신호였던 것이다.
진우는 즉시 박사 다리의 포박을 풀고 그를 일으켰다. 그리고는 박사와 함께 승강장의 비상구 쪽으로 이동했다. 그 즉시 진우의 휴대전화기로 문자 메세지가 왔다. 문자에는 '8'이라는 간단한 내용이었지만, 진우는 그 뜻을 잘 알 수 있었다. 미리 정해놓은 암호에 의하면 그 숫자는 '다 틀렸다. 작전은 실패다. 각자 흩어져 능력껏 도망쳐라.' 하는 최악의 상황을 나타내는 글씨였다. 게다가 먼 곳에서 총성이 들려왔다. 그 총성으로 확실히 알았다. 경찰이 아닌 정규군이 투입되어 한민련을 진압하려 하고 있었다.
진우는 박사의 팔을 잡고 비상구 바깥쪽으로 빠르게 뛰었다. 계단을 급하게 내려갈 때는 박사와 같이 꼬꾸라질 정도였다. 진우는 어쩔 수 없이 박사의 팔을 놓은 다음 총으로 위협하며 그에게 따라오라는 지시를 했다. 그리고는 정신없이 달렸다. 그제야 박사는 영문을 물어보았다.
"무슨 일인가. 인질 협상이 잘못되기라도 했나?"
달리고 있었지만 진우는 그리 어렵지 않게 대답할 수 있었다.
"정부에서 인질과 한민련을 모두 깡그리 몰아서 죽이려 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걸 아나?"
"우린 당신 같은 인질을 상당수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방금 제 핸드폰으로 도망가라는 메시지가 왔고, 입구 쪽에서는 국군이 사용하는 중화기 소리가 들립니다."
박사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기 시작했다.
"그거였군."
"네?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오늘 아침에 내가 참석한 회의에서 군사부가 초록 먼지 관련 일에서 손을 떼겠다는 발언을 한 적이 있네. 혁명이 조짐을 보여서 그걸 제압하겠다고 말이야."
진우는 경악했다.
"그럼 그게?"
"그래. 이 인질극이 아마 미리 새 나갔었던 모양인가 보군. 자네들 작전은 실패했네. 혹시 투항할 생각은 없나?"
진우는 왼손으로 이마를 감싸쥐고는 말했다.
"제기랄. 해 봤자 어차피 총살 아닙니까."
"그럼 자네는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
"공항 뒤편에 사막 정찰 차량이 있습니다. 평원 변두리에 있는 공항이니 당연히 있어야겠지요. 그걸 타고 탈출할 겁니다."
"나는……."
"탈출이 끝날 때까진 협조해 주셔야겠습니다."
진우와 박사가 출입구 바깥으로 나오자 넓은 활주로와 그 너머 사막이 보였다. 둘은 짐을 옮기는데 사용하는 카트에 탑승했고, 카트는 활주로를 가로질러 공항 뒤쪽으로 가기 시작했다. 그때 총성이 상당히 크게 울리고, 카트 앞쪽 길바닥에서 불꽃이 튀었다. 진우는 뒤에서 총을 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카트의 액셀러레이터를 더 세게 밟았으나 카트의 속도는 그리 늘지 않았다. 그 사이에 총알이 몇 발이 더 날아왔다.
"당신……."
진우는 주머니에서 잠깐 박사의 명함을 꺼내 본 다음에 말을 이었다.
"박사님. 박사님은 중요 인사 아니었습니까? 왜 저들이 박사님까지 죽이려 듭니까?"
총성에 질려 있던 박사는 아무 답변도 하지 못했고, 진우는 말을 이었다.
"좋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다 치지요. 그런데 지금 좋은 생각이 났습니다. 이렇게 합시다. 일단 성공적으로 여기서 도망 나가는 겁니다. 그리고 저는 정찰 차량을 타고 티베트 고원까지 갑니다. 그런데 그전에 무조건 중화 평원을 지나쳐야 한다는 것은 박사님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거기서 박사님을 바로 석방해 드리겠습니다. 그럼 박사님은 중화평원에 있는 대중화 인민 공화국에서 미국행 비행기를 타고 회의에 참석하실 수 있을 겁니다. 어차피 인질로서의 가치는 탈출할 때까지만이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양측에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박사는 그 말에 대한 답변으로 뭐라고 말을 하였으나, 총소리에 묻힌데다가 애초에 목소리를 작게 냈었기 때문에 진우에게 들리지는 않았다. 그 사이에 카트는 공항 뒤쪽 사막 정찰차량 보관소에 들어섰다. 거기엔 많은 사막 정찰차량이 있었는데 진우는 그 중 한 차량에 탑승하고는 박사를 뒷좌석에 태웠다. 그리고는 운전대 밑 덮개를 뜯어내어 기계를 조작해 시동을 걸었다.
이 사막 정찰차량은 평원 바깥쪽의 사막에서 벌어질 수 있는 추락 사고에 대비해 비치되어 있는 차량이었고, 사막에서 주행하는데 매우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 차를 탑승하고 평원 바깥쪽으로 도주하면 경찰이 다른 수단으로는 쫓아오지 못했기 때문에 한민련 단원 사이에서 '망명차'라고 불리기도 할 정도였다. 그렇기에 진우는 잡힐 것을 걱정하진 않았다. 바깥쪽으로 빠져나가기만 하면 탈출은 100% 성공한다고 볼 수 있었다. 진우는 눈을 확 치켜뜨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진우가 탄 차량이 보관소를 빠져나가는 순간 총성이 연속적으로 울리면서 총알이 쏟아졌다. 진우가 고개를 급히 숙이자 총알은 모두 위쪽으로 지나갔고, 그가 탄 차량은 평원 바깥쪽으로 안전하게 빠져나왔다. 그는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을 부여잡고 뒷좌석을 돌아본 진우는 자기가 뭘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잃어버릴 정도로 놀랐다. 박사가 피투성이로 죽어있었다. 아마 방금 전의 총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경찰이나 군대의 추격이 불가능한 위치까지 도망친 다음 진우는 박사의 시체를 버렸다. 그는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으나 아무 장비도 없이 사막에 시체를 매장하기엔 사정의 여의치가 않았다. 박사의 시체를 뒤에 싣고 사막을 횡단할 수도 없었고 말이다.
그 후 며칠간 진우의 도망은 계속되었다. 물, 식량, 석유는 충분했고 차량은 모래 정도로 고장이 나지 않을 정도로 튼튼했으니 일교차면 조심하면 망명은 쉽게 끝날 터였다. 그러나 여행의 종말은 이상한 형태로 찾아왔다. 어느 날 아침, 진우가 먼 곳에서 초록색 먼지 구름을 발견한 것이다.
그건 '초록 먼지'였다. 진우는 그제야 초록 먼지 군락 하나가 중화 평원 북쪽을 거쳐 고려 평원으로 진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그 이외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뒤쪽이 보이지 않는 짙은 녹색 먼지 구름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다가오고 있을 때에는 누구나 이질적인 위압감을 느껴 행동이 멈출 것이다.
진우도 그러했다. 그는 먼지 구름이 그를 덮칠 때까지 도망도 치지 못하고 가만히 먼지구름을 응시하고 있었다.
3.
수많은 초록 먼지 군락은 각자 전기 신호를 이용해 서로 구분한다. 그중 아랍 평원을 넘어 중화평원 북쪽을 통해 고려 평원으로 날아가는 이 초록 먼지 군락은 그들 사이에서 101101010010111로 불리는 존재였다.
그는 이름 맨 끝에 1이 붙는 군락이었는데, 이 군락은 군락 내의 개체가 다른 개체와 전기 신호를 교환할 수 있는 무리였다. 그들이 '통신(通信)'이라고 부르는 이 형질은 발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형질이었다. 하지만, 그 형질을 지는 개체는 생존에 정말 유리했고, 군락 내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넓혀 나갔다. 곧 많은 군락 전체가 이 형질을 가지게 되었다. 그 군락들은 전기 신호를 이용한 통신을 점점 발전시켜갔다.
비록 접촉을 해야 한다는 제한점이 있었지만, 이 통신 형질은 군락 사이에서 빠르게 퍼져 나갔다. 군락을 단순히 '개체의 군집'이 아닌 유기적 행동을 할 수 있는 생명체로 변화시키는 형질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01101010010111 같은 특수한 군락은 통신을 통해 '기억'과 '사고(思考)'라는 능력을 같이 발달시켰다. 간단했다. 단지 그 전기 신호를 다른 형태로 저장하는 것과, 일정한 신호 회로를 만들어서 논리적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뿐이었으니까 말이다.
101101010010111이 그 능력을 얻은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다. 아랍 평원 내에 있는 유기물을 전부 흡수하고 난 이후이니 1주일도 채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매우 빠르게 개념을 정립하고 주변 세계에 대해서 배워갔다.
101101010010111이 세계에 대해 탐구하며 개체와 군락에 대한 생명과 존재까지 파악할 정도가 되었을 때 마른 땅에서 한 유기물이 그의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마른 땅을 오랫동안 여행한 탓에 굶주린 일부가 반사적으로 공격을 시도했고, 그 유기물은 생명을 유지하는 장치를 거의 잃게 되었다.
그때, 101101010010111은 유기물과 전기 신호를 교류하는 게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01101010010111은 즉시 그들을 통제했고 그와 전기 신호를 나누었다. 그리고 세 가지 중요한 개념을 전달받았다.
101101010010111은 첫 번째로 '인간'이라는 개념에 대한 신호를 받았다. 그로 말미암아 그와 지금 전기 신호를 나누는 유기물이 인간이며, 군락생활을 하고 복잡한 활동을 하며 현재 이 땅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 등을 알게 되었다.
두 번째로는 '초록 먼지'라는 개념에 대한 신호를 받았다. 초록 먼지는 바로 101101010010111 같은 것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를 통해 그와 같은 군락이 전 세계에 뻗어 있음을, 초록 먼지와 인간은 현재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101101010010111은 '민주'라는 개념에 대해서 전달받았다. 이 개념을 전달할 때 인간의 신호가 불안정해서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대충 민주란 군락 생활을 할 때 개체끼리 유지하는 관계의 일종이며, 개체 모두가 같은 권리를 가지고 군락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라는 신호였다.
모두 101101010010111에게는 너무 벅찬 개념이어서, 단지 개념을 저장만 했을 뿐 그것을 이용해 판단하거나 행동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다른 초록 먼지 군락을 만났을 때 대화를 통해 이 개념들을 확실히 이해해야겠다고 판단하고는 동쪽으로 날아갔다. 물론 그 유기물을 소화, 흡수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101101010010111은 계속 날았다. 그런데 그가 가는 길에는 젖은 땅이 나오지 않았다. 그를 구성하는 개체에 공급할 영양이 부족했기에 일부를 희생하여 영양을 공급했다. 그리고는 계속 날기만 했다.
오랫동안 하늘을 날다 보니 물로 된 넓은 땅이 나왔다. 거기서 그는 다른 초록 먼지 군락을 만나게 되었다. 그 초록 먼지 군락도 통신을 할 줄 아는 군락이어서 101101010010111은 반갑게 신호를 보내 통신을 시작했다.
그는 먼저 그가 저장하고 있었던 개념을 보냈다. 인간과 초록 먼지에 대한 개념은 다른 군락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었다. 그런데 '민주'에 대한 개념을 보내자 갑자기 그 군락이 전기 신호를 끊어버렸다. 그리고는 101101010010111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워낙 갑작스러운 반응이어서 101101010010111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그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했을 때는 이미 그를 구성하는 상당수의 개체는 이미 상대의 공격에 녹은 이후였다.
101101010010111은 그의 기억과 사고가 조각조각 갈라지는 것을 느끼며 소멸했다. 하지만, 소멸하기 전에 '민주'의 기본적인 개념을 담은 개체를 퍼뜨렸고, 그들은 성공적으로 퍼져 나갔다.
E.
다음날 뉴스.
"어제 오후 4시쯤에 가빈 국제공항이 테러 단체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공항 내에서 인질극을 벌이며 특정 죄수의 석방을 요구했으나 다행히도 군부대의 빠른 대응에 굴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사상자가 일부 발생했는데, 그중에는 국민을 위해 온몸을 다 바쳐 헌신하던 과학부 수석 자문위원인 진이곤 박사가 속해있어 많은 국민이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정부는 이 잔혹한 테러 단체를 한민련이라 추측하고 있지만 한민련 측 대변인은 이를 극구 부인하고 있습니다."
1개월 후 뉴스.
"희소식입니다. 시청자 여러분 모두 초록 먼지라는 공포의 생물을 잘 아실 겁니다. 전 세계를 휩쓸며 수많은 인명피해를 냈던 생물이죠. 그런데 요즘 이 초록 먼지의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합니다. 정확한 원인은 파악이 안 되었지만 '혹시 자신들끼리 싸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견이 주를 보이고 있다 합니다. 이유가 어쨌든 간에 전문가들은 대부분 이 초록 먼지가 곧 멸종하리라는 전망을 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