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마당 - 단편 게시판
글 수 517
니체는 예리하다
<안티 그리스도>(Der Antichrist, 1888)
아프다.
나의 예리한 신경은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내 가슴을 찌른다.
범인들은 내가 얼마나 그들의 둔감함을 부러워 하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신은 범인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입고 있는 둔감함이라는 갑옷조차 입히지 않은 채 벌거숭이인 나를 이 잔혹한 세상에 내보냈다.
그리고 나는 내 천성적인 예리함때문에 수많은 밤을 괴로워 해야만 했다.
그렇기에 나는 신을 증오한다.
그리고 이 세상을 증오한다.
<비극의 탄생>(Die Geburt der Tragoedie,1872)
(그리스비극의 몰락은 종전의 다른 모든 예술의 종류와는 달랐다. 그리스비극이 자살로 인해, 풀기 어려운 상극으로 인해, 즉 비극적으로 죽은 것에 비해 이러한 예술들은 천수를 누리고 극히 아름답고 편안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미국의 딕 체니 부통령의 임기가 1년도 채 남지 않고, 내 대학 1학년의 끝은 그보다도 더 얼마 남지 않았던 겨울날이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강의실 한구석에 앉아 머리를 책상에 닿도록 숙이고, 쇼펜하워를 독파하고 나서 읽기 시작한 니체의 책을 파고 있었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의실에서 몇번 들어본 적 있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하마터면 그 날도 그녀의 목소리를 그냥 흘려 듣고 말 뻔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싫어.”
무라카미 하루키씨에게는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많은 도움을 받아 왔지만, 그 날만큼 그에게 감사했던 적은 없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녀를 눈 앞에서 놓칠 뻔 했다. 그리고 평생토록 내가 놓친 게 무엇인지조차 모를 뻔 했다.
나는 니체의 책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싫다고?”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역시 무라카미 하루키를 그닥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관심이 없었다. 단지 ‘무라카미 하루키를 싫다고 말하는 여성’에게 관심이 생겼을 뿐이다. 사실 내 주변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싫어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나역시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딱히 생각나는 작가가 없을 경우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름을 대곤 했던 것이다.
“어, 어머. 듣고 있었어?”
늘씬한 몸매에 갈색 생머리가이 허리까지 내려오는 여자가 나를 보며 놀란 듯 눈을 커다랗게 뜨고 말했다.
“어째서지?”
나의 목소리는 공허했다. 메말라 있었다. 아마 질문의 내용과 메마른 어조로 인해 그녀는 무척 당혹스러워 했을 것이다.
“아, 아니. 난 싫다는 건 아니고, 그냥 좀 읽기가 어려워서……. 취향에 안 맞더라는 얘기였지. 네가 그렇게까지 하루키를 좋아하는 줄 몰랐어.”
나는 피식 웃었다. 그녀는 지금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골수 팬인 줄 오해를 하고 있다.
“나도 무라카미 하루키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아.”
담담하게 말했다. 처음인 것 같다.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게.
“그, 그래?”
그제서야 그녀는 약간 안심한 듯이 웃었다. 웃는 모습이 참 예뻤다.
“그럼 누구를 좋아하는데?”
궁금해 졌기에 물어 보았다. 과연 그녀는 어떤 사람일까. 좋아하는 작가는 누구고, 좋아하는 책은 뭐고, 좋아하는 영화는 뭐고, 좋아하는 드라마는 뭐고, 좋아하는 배우는 누구고, 좋아하는 음식은 뭘까.
“응?”
“좋아하는 작가 말이야.”
내가 생각해도 내 목소리는 너무나 삭막하다.
“음… 좋아하는 작가는… 제인 오스틴.”
흠, 제인 오스틴인가. 정말로 좋아하는지, 아니면 그냥 입에서 나온 작가가 제인 오스틴인지 모르겠지만, 제인 오스틴이라는 이름은 내 흥미를 끌었다.
“오만과 편견?”
“응. 엠마가 좋아서.”
흠. 그렇군. 엠마…….
“메텔. 가자.”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정미라는 여자아이가 말했다. 나는 정미가 경멸과 혐오가 뒤섞인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느꼈다. 상관없다. 그런 눈초리는 내게 너무 익숙했으니까.
“어, 알았어. 그럼 다음에 또 보자.”
그녀는 그녀의 친구와 함께 강의실을 나갔다.
나는 천천히 시선을 다시 책으로 돌렸다.
이가 아팠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 1878)
((전략)그렇지만 고독이란 무엇인가? 오늘날 누가 그것을 알 수 있으랴.)
나는 치과의 진료대 위에 멍하니 누워, 낮에 만났던 그녀를 떠올렸다.
나예리. 그녀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메텔이라는 별명으로 더 자주 불린다. 그녀는 정말 애니메이션, <은하철도999>에 나오는 메텔을 꼭 닮아 있었다. 길게 자란 갈색의 생머리, 새하얀 얼굴, 조용한 성격,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수를 담고 있는 맑은 눈. 그녀는 아름다웠다.
“저런. 지난 번보다 이가 많이 상했네요.”
여의사는 라이트의 노란 빛으로 내 입 안을 들여다 보며 말했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평범한 인간사회와는 동떨어진, 이질적인 존재였다. 애시당초 내게는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산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누구도, 심지어는 부모조차도 내가 갖고 태어난 범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예리함과 그에 따른 고통을 이해할 수 없었고 나는 홀로 괴로워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나를 이해하기 보다는 별종, 괴짜로 취급하고 배제하는 편이 더 경제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언제나 외톨이였다. 아마도 내 예리한 감각은 다른 사람들에게 생리적인 경멸과 혐오를 불러 일으켰던 것 같다.
그리고 내 이를 차가운 금속으로 건드리며 내 예민한 감각을 자극하고 있는 이 여의사도 다를 바 없었다. 그녀는 커다란 마스크로 입과 코 주위를 가리고 있었기에 그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표정은 눈뿐이었다. 그 여의사는 자의이 표정관리가 완벽하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그녀의 눈에 떠오른 표정은 나에 대한 명백한 혐오감이었다. 아마 그녀가 이런 직업에 속해서 나같은 사람에게서 돈을 받고 살지 않아도 되었다면, 나같은 인간에게 이렇게 많은 말을 건네는 일은 결단코 없었을 것이다.
메텔……. 그녀라면 어땠을까? 그녀도 다른 사람들처럼 나를 경멸하고, 무시하고, 혐오할까? 아니면 그녀는…… 어쩌면 나를 이해해 줄까?
“차가운 거 먹을 때 이가 많이 시리죠? 치주염입니다. 잇몸이 많이 상했어요.”
그녀는 단단하고 차가운 금속으로 내 예민하기 짝이 없는 잇몸을 무신경하게, 건드리며 남의 일이라는 듯이 말했다.
“양치를 주의해서 해 주세요. 이러다가 진짜 큰 일 날 수도 있어요.”
아, 도대체 이 말이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이 몇 번째란 말인가. 나는 지난 몇 년간 이 치과에 다니면서 그녀와 대화를 나눠 왔으나 지금 그녀가 한 말은 수도 없이 들은 말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녀의 성의없는 충고를 사흘 이상 기억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석 달 후에 또 와 주세요. 충치 치료한 게 도질 듯 말 듯 해요. 조심해서 잘 좀 해 주세요.”
이 말역시 그녀가 수없이 반복해 온 대사 중 하나였다. 이런 식으로 그녀는 치석을 제거한다느니, 치아의 마모상태를 확인한다느니, 염증의 경과를 지켜본다느니, 온갖 핑계를 갖다 붙이며 3개월 후의 환자를 확보해 두는 것이었다. 그리고 분하게도, 양치질을 게을리 하고, 그러면서도 치아에 대해서는 예민한 나로서는, 그것이 치과의 뻔한 상술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3개월 후에 또다시 이 병원을 방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녀는 진료대를 일으켜 세웠다.
“건강 잘 챙기세요.”
그녀의 말에 진심이라고는 털끝만큼도 담겨 있지 않았다.
아, 싫다. 싫어. 가식으로 뒤덮힌 이 세상이 정말 싫다. 이 세상에 진실된 것은 나랑, 내 아픔과 내 예리함과 메텔밖에 없는 것 같았다.
진료실을 천천히 걸어 나가며 나는 집에 가는 도중에 서점에 들러 제인 오스틴 전집을 사기로 마음먹었다.
<짜라투스트라는 그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 1885)
(진정으로 진리의 구애자가 그렇게 없다는 말인가./조용한, 단단한, 원활한, 차가운/입상이 되는 일 없이/신의 원주가 되는 일없이/신의 문을 지키고/신전앞에 앉는 일도 없다./아니!그러한 진리의 입상의 적으로서/어떤 황야에 있는 것도 신전 앞에 있는 것 보다는 낫고/고양이와 같이 방자하게/모든 창문으로부터 뛰어 들어가/홀연! 모든 우상 속에서, 또/모든 원시림 속에서 생명의 냄새를 맡는다./그렇게 원하고 부러워 했던 것의 냄새를 맡는 것은,/원시림에 들어가/오색찬란한 반점이 있는 맹수와 교접하고/죄많은 건강도 아름답게 달리기 위한,/또한, 갈망의 입술을 불어/행복에 취해 조소하고, 행복에 취해 지옥에 떨어져,/행복에 취해,/피에 목마르기 위해서다./약탈하면서, 몰래 다가가면서, 훔쳐 보면서/달리기 위해서다.)
나는 그녀를 지켜보고 있다.
그녀는 지루한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만지고 있다. 정확히는 검지손가락으로 머리칼을 돌돌 말며 수업이 따분하다는 감정을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곳에 있다. 잡고 싶다. 그녀의 탐스럽게 빛나는 블론드색 머리칼을. 솜털이 난 목 언저리를.
얼마동안 나는 그녀를 관찰해 왔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녀는 나와 닮았다.
겉보기에는 나와 그녀는 전혀 닮지 않았다. 그녀는 빼어난 미모로 모두의 선망을 받고 있었고, 나는 모두가 혐오해 마지 않는 ‘괴물’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나와 닮았다. 그녀는 외롭다. 그녀의 주위에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있더라도, 그녀는 본질적으로 혼자였다. 그녀는 누군가를 그리워 하고,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다. 세상에 그 외로움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은 나와 그녀밖에 없다. 바꿔 말하자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나와 그녀밖에 없었다.
“메텔?”
수업이 끝난 후, 나는 부끄럼을 타면서도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외로운 눈이 나를 쳐다 본다. 아마도 나의 눈 역시 그녀의 눈처럼 외로울 것이다. 아마도 그녀는 누군가가 그녀에게 다가가기를 지금까지 기다려 왔을 것이다.
“왜?”
“아니, 그냥…….”
아니, 그냥……. 이라니. 그냥 이름을 부를 리가 없잖아.
“지난번에 니가 제인 오스틴 좋아한다고 했잖아.”
“아… 그거?”
그녀의 얼굴이 놀란 듯이 보였다.
“나도 읽기 시작했는데, 제인 오스틴 좋은 것 같아.”
“응… 재밌지?”
그녀의 반응이 왠지 떨떠름하게 생각되었지만, 이야기를 계속 했다.
“그래. 정말 정말 재밌어. 네 덕분에 좋은 책을 알게 되었어. 고맙다는 말 하고 싶었어.”
그녀는 자리에 앉은 채 나를 올려다 보았다.
“그러고 보니, 너 책 많이 읽는다, 그지?”
아아, 그녀는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수업마다 책에 파묻혀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많이 읽기는 뭘. 그냥 할 일 없을 때마다 읽는 것 뿐인데…….”
“지금 읽는 책은 뭐야?”
“니체의 <선악의 피안>.”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렇지 않아도 큰 그녀의 눈이 동그래 질 때면 그렇게 귀엽고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니체라니. 우와. 대단하다.”
“뭘…….”
“무슨 내용이야?”
그녀의 질문에 나는 좀 당황했다.
“솔직히 말하면, 잘 모르겠어. 니체 이 사람은 도대체 글을 왜 이렇게 어렵게 쓰는지……. 그래도, 말 하는 게 마음에 안 들어. 아무래도 이 사람 시니컬 초코딩인 것 같아. 그러니까 히틀러같은 색기가 이용해 먹었지. 선악도, 도덕도 없다고? 우리의 삶은 영원회귀라고? 영원회귀를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초인이라고? 그렇지만 난 받아들일 수가 없어. 난 약하니까. 초인이 아니니까. 니체라면 원한(ressentiment)에 빠진 천민이라고 부르겠지. 그렇지만, 약한 게 어때서? 원한이 어때서? 천민이 어때서? 그래서 나는 니체를 좋아할 수가 없어. 난 근대적 이성의 노예니까.”
말이 끝나자 그녀는 특유의 깊은 눈망울로 나를 쳐다 보았다. 괜히 썰렁한 말을 한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메, 메텔은 니체 읽어본 적 있니?”
“아니.”
이겼다.
“…….”
“…….”
할 말이 없다. 대화가 끊겼다. 이럴 때는 무슨 얘기를 하면 되지? 여자랑 얘기해 본 경험이 전무한 나로서는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난 왜 메텔이랑 니체에 관한 애기를 하고 있는 걸까. 차라리 메텔이라도 무슨 말을 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녀역시 수줍음을 타는 성격인지라, 그 큰 눈망울을 껌뻑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건 그렇고, 메텔은 무슨 음식이 좋아?”
어쨌든지 대화를 끌어가고 싶던 내가 꺼낸 화제는 이런 것 뿐이었다. ……. 아, 나란 인간은 도대체 왜 이 모양일까?
“응?”
“좋아하는 음식말이야.”
그녀는 한동안 황당한 표정을 짓더니, 작게 웃었다.
“너, 참 재미있는 애구나.”
나도 따라 웃었다.
“난 아보카도가 좋아. 넌 어때?”
“나? 나도 아보카도가 좋아.”
솔직히 얘기하자면 별 생각없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아보카도를 좋아한다고 말한 순간부터 세상에는 아보카도라는 과일밖에 존재하지 않게 된 기분이었다.
“어, 그래?”
그녀는 웃었다. 웃는 모습이 너무 예쁘다.
<선악의 피안에서>(Jenseits von Gut und Böse, 1886)
(진리란 여자다. 라고 가정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모든 철학자가 그들이 독단론자였던 이상, 이 여자를 잘 이해하지 못 했던 것은 아닌가하는 의심도 타당한 것이 아닌가? 그때까지 그들이 진리에 가까이 갈 때, 취했던 상투적인 방법인 놀랄 만한 엄숙함, 보기 싫은 뻔뻔함은 여자라는 것을 길들이기에는 실로 졸렬한, 어울리지 않는 방법은 아니었는가? 여자를 길들일 수 없었던 것도 당연하다.(후략))
나는 철학자가 되고 싶은 생각따위 추호도 없다. 그렇지만 만일 철학자가 되기 위한 첫째 조건이 세간으로부터의 고립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 조건이 여자로부터 인기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고, 셋째 조건이 정리정돈이라는 단어를 혐오해야 한다는 것이라면, 나는 완벽하게 그 조건들에 부합할 것이다. 특히 셋째 조건.
내 방은 어지럽다. 그나마 어머니라는 존재와 함께 살았을 때는 방을 청소해 주기라도 했는데, 지금은 더이상 인간의 거처라고 보기 힘든 상태에 이르렀다. 컴퓨터의 양 옆에는 서류와 책이 산을 이루고 있고, 방바닥에는 서류와 그외 잡다한 물건들이 카펫을 가리고 섬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어지러운 와중에서 나는 침대에 누워 <선악의 피안>을 읽고 있으니, 어쩌면 철학자라는 이름이 내게 어울리는 지도 모르겠다.
각설하고 <선악의 피안>은 어렵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내가 철학 전공도 아니고, 책을 읽어왔다고는 해도, 거의가 쉽게쉽게 읽히는 판타지소설이었기에, 니체의 말을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봤자 <선악의 피안>도 어차피 니체의 뒷담화 험담 모음집에 불과했지만…….
고등학교때 선생님은 니체는 나약한 인간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내가 읽은 니체는 나약한 인간들을 경멸하는 강한 거인이었다. 오히려 나약한 것은 나였다. 다만, 나는 인정하기 싫지만, 어딘가 그가 나와 닮았다는 것을 느꼈다. 예를 들자면, 그의 예리함이다. 니체는 예리하다. 그리고 그 예리함은 내가 나의 예리함때문에 고통스럽듯이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고통이야말로 그 철학의 근원이 아닐까.
니체는 그 예리함때문에 괴로워 했을 것이다. 교수직에서 짤리고, 바그너에게 실망하고, 루 살로메에게 실연당하고, 기독교를 그토록 싫어하고, 평생 타성과의 싸움에 몸을 바치고, 결국 미치고, 죽을 수밖에 없었던 그는 고결한 인간이었다. 어쩌면 그역시도 인간의 정신을 자유롭게 하려 했던 해방자였는지도 모른다.
니체와 달리 나는 예술적 감성을 가지지 못 했다. 어렸을 적부터 예체능과목에는 약했던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너무나 메말라 있었다. 아마 나는 바그너를 사랑하지 못 했을 것이다. 그것이 나와 그의 가장 큰 차이점일런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무심코 이를 악물었다. 왼쪽 아래의 어금니가 아파온다. 그러고 보니 한참 전에 포테토칩을 먹은 후에 양치를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칫솔을 입에 물고 잠시 방을 나섰다. 그리고는 한참을 칫솔로 이를 부벼댔다.
아프다. 가슴이.
방으로 돌아온 나는 프리드리히 니체를 책상위의 책산의 정상에 올려 놓고는 책장에서 제인 오스틴을 꺼내 들었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려고 한다.
<도덕의 계보>(Zur Genealogie der Moral, 1887)
((전략)”나는 괴롭다. 이건 누군가의 탓에 틀림없어” 모든 아파하는 양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목자인 금욕주의적 승려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 양이여. 그것은 누군가의 탓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그 누군가는 사실 너자신인 것이다. 그것은 오직 네 탓인 것이다. 네가 이렇게 된 데 책임이 있는 것은 너뿐이다.”(후략))
오늘도 나는 걷는다. 땅바닥을 내려다 보면서. 이 지긋지긋한 길을.
문득 주위를 둘러본다. 하얀 김이 입에서 나왔다. 두꺼운 점퍼를 껴 입은 사람들이 몸을 움츠리고 걷고 있었고, 나무는 그 앙상한 가지만이 외롭게 떨고 있었다. 이제 겨울은 마지막 맹위를 펼치고 있었다. 머지않아 또다시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또다시 겨울이 올 것이다. 그 돌고 도는 계절의 흐름조차 짜증난다. 세상 모든 것이 역겹다.
그런 내게 단 하나 특별한 게 있다. 그녀다.
“메테-ㄹ”
나는 그녀를 불렀다. 알록달록 빵모자에 털 스웨터를 껴 입은 그녀가 얼굴을 돌렸다. 그녀는 오늘도 아름답다. 다만, 그의 곁에는 남자가 있었다. 그의 얼굴은 꽤 미남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신경쓰지 않고 메텔에게 다가갔다. 어차피 나와 그녀 이외의 존재에는 별다른 관심도 없었기에.
“안녕.”
그녀는 떨떠름한 얼굴로 인사를 받았다.
“어, 그래. 안녕.”
그녀의 곁에 있던 남자는 나를 잠시 쳐다 보더니 말했다.
“메텔. 나 먼저 가 있을게.”
그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메텔, 있잖아. 제인 오스틴 말인데.”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 졌다. 나는 그녀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
“있잖아…….”
그녀가 힘들게 말을 꺼냈다.
“나 요즘 제인 오스틴이 아니라 에쿠니 가오리를 읽고 있어.”
“뭐? 에쿠니 가오리?”
에쿠니 가오리? 도대체 어떻게 제인 오스틴에서 에쿠니 가오리로 이행할 수 있는 거냐.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싫어하면서도 에쿠니 가오리는 좋더냐. 아니, 뭐 에쿠니 가오리라도 상관없지만…….
“그리고 말야.”
그녀는 더욱더 망설이며 눈을 땅으로 내려 깔았다. 그녀의 밑에는 검회색의 아스팔트 바닥만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메텔이라고 부르지 말았으면 좋겠어. 괜히 부담스럽거든.”
부담스럽다고? 나는 멍해졌다.
“알았어?”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확인사살을 가했다.
“어……. 그래.”
나는 마지못해,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얼떨결에, 힘없이, 대답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래, 그럼 안녕. 다음에 또 보자.”
그녀는 그렇게 사라졌다. 잡을 수 있는 곳에 있었던 그녀는 점점 멀어졌다.
결국은 그녀도 그런 여자였다. 그런 인간이었다. 나와는 다른, 나와는 이해할 수 없는, 나와는 섞일 수 없는 그런 부류의 인간에 불과했다. 결국은 그녀도 나를 버린 것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그래, 그런 것쯤은 각오하고 있었던 일이다. 애시당초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나를 이해해 주기를 바란 적은 없었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갈 때, 항상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슬프다.
가슴이 아프다.
나는 세상에 혼자였다.
그래, 원래부터 혼자였지 않은가. 모든 것은 내 착각이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난 영원히 혼자였다. 아----------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가 내 이가 아닌 것처럼 아파왔다.
<우상의 황혼>(Götzen-Dämmerung, 1888)
((전략)그 가장 소원한 여러 문제들에 대해서조차 생 그자체에 ‘그렇다’라고 단언하는 것, 그 최고의 전형을 희생으로서 바치면서 내자신의 무진장함에 광희하는 생에의 의지- 이것이야말로 나는 디오니소스적이라 이름붙이고, 이것이야말로 나는 비극적 시인의 심리학에의 다리로서 달성하고 싶다. 공포나 동정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격렬한 폭발에 의해 위험한 욕정으로부터 몸을 깨끗이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게 해석했었지만- 그게 아니라, 공포나 동정을 넘어서 생성의 영원한 쾌감, 그 자체가 되기 위해서이다. 부정으로 느끼는 쾌감마저 그 자신 속에 내포하고 있는 그 쾌감과… 그리고 이로서 나는 일찍이 내가 거기서 출발했던 구절을 다시한번 짚고 넘어가게 된다. <비극의 탄생>은 내 최초의 모든 가치의 가치전환이었다. 즉, 그것으로 나는 내 의욕, 내 능력이 거기서 자라난 땅에 다시한번 몸을 놓는 것이다. 철학자 디오니소스의 마지막 제자인 나는, 영원회귀의 교사인 나는…….)
부귀니 명예니 하는 대단한 것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단지 나를 이해해 줄 사람, 그것 하나만 있었으면 그걸로 충분했을텐데, 그것마저 내게는 너무 과분한 욕구였던 모양이다.
집에 들어온 내 눈에는 이제는 낯익어 버린 어지러움이 들어왔다. 이제, 이 방을 감히 ‘청소’하겠다는 생각은 버린 지 오래였다. 특히나 오늘같은 날은 저런 일에 신경쓸 기력조차 없다.
나는 책상으로 가서 읽고 있던 제인 오스틴의 페이지를 열었다. 그리고 어제 읽었던 곳부터 읽기 시작했으나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읽는 게 읽는 게 아니었다. 곧 나는 책을 닫았다.
“하아------------“
가슴이 아프다.
나는 냉장고에서 아보카도를 꺼냈다. 껍질이 검붉다. 왼손에 아보카도를 들고, 오른손에 든 과도를 아보카도의 과육 깊숙히 찔러 넣었다. 아보카도의 중심에 핵처럼 심어져 있는 거대한 씨앗에 과도가 당도한 것을 느끼고, 과도를 180도 돌렸다. 그러자 아보카도는 양분되어 그 초록색 과육을 보였다. 일단 안에 있는 황색의 씨앗을 빼냈다. 그리고 스푼으로 아보카도의 과육을 파 내 입에 넣었다.
이가 시리다. 과육이 어금니와 잇몸 사이의 치육에 붙는 순간, 나는 아픔을 느꼈다.
나는 아프다. 아보카도의 과육에 잠식당한 잇몸이. 지난 밤, 잠결에 깨물어 버린 혀가. 책과 컴퓨터에 찌든 눈이. 타성과 욕망과 의미와 고뇌에 병든 정신이. 그리고 가슴이.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삶은 너무나 괴롭다.
내 눈에 문득 테이블 위에 있는 아보카도의 녹황색 과육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과도가 들어왔다.
나는 과도를 손에 쥐었다.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1900년 8월25일 죽었다.
그리고 나는 니체가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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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6월24일은 제인 오스틴을 좋아하고,
요구르트를 좋아하고,
우수에 찬 눈이 예뻤던,
멀지 않은 곳에 있었지만,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었던,
한 친구의 생일입니다.
…….
예. 일기는 일기장에.
독후감은 독서기록장에.
연애편지는 편지지에!
뻘글은 판갤에!
p.s.2 근데 워드에서 쓴 걸, 복사해서 붙여넣으면 문장 앞에 인덴트가 안 되네요.
뭐, 그러려니 하지만.....
p.s.3 본문에서 니체 인용문은 ちくま学芸文庫의 니체전집시리즈를 제가 임의로 번역한 것입니다.
틀릴 지도 모르니 양해바랍니다.
<안티 그리스도>(Der Antichrist, 1888)
아프다.
나의 예리한 신경은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내 가슴을 찌른다.
범인들은 내가 얼마나 그들의 둔감함을 부러워 하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신은 범인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입고 있는 둔감함이라는 갑옷조차 입히지 않은 채 벌거숭이인 나를 이 잔혹한 세상에 내보냈다.
그리고 나는 내 천성적인 예리함때문에 수많은 밤을 괴로워 해야만 했다.
그렇기에 나는 신을 증오한다.
그리고 이 세상을 증오한다.
<비극의 탄생>(Die Geburt der Tragoedie,1872)
(그리스비극의 몰락은 종전의 다른 모든 예술의 종류와는 달랐다. 그리스비극이 자살로 인해, 풀기 어려운 상극으로 인해, 즉 비극적으로 죽은 것에 비해 이러한 예술들은 천수를 누리고 극히 아름답고 편안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미국의 딕 체니 부통령의 임기가 1년도 채 남지 않고, 내 대학 1학년의 끝은 그보다도 더 얼마 남지 않았던 겨울날이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강의실 한구석에 앉아 머리를 책상에 닿도록 숙이고, 쇼펜하워를 독파하고 나서 읽기 시작한 니체의 책을 파고 있었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의실에서 몇번 들어본 적 있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하마터면 그 날도 그녀의 목소리를 그냥 흘려 듣고 말 뻔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싫어.”
무라카미 하루키씨에게는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많은 도움을 받아 왔지만, 그 날만큼 그에게 감사했던 적은 없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녀를 눈 앞에서 놓칠 뻔 했다. 그리고 평생토록 내가 놓친 게 무엇인지조차 모를 뻔 했다.
나는 니체의 책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싫다고?”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역시 무라카미 하루키를 그닥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관심이 없었다. 단지 ‘무라카미 하루키를 싫다고 말하는 여성’에게 관심이 생겼을 뿐이다. 사실 내 주변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싫어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나역시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딱히 생각나는 작가가 없을 경우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름을 대곤 했던 것이다.
“어, 어머. 듣고 있었어?”
늘씬한 몸매에 갈색 생머리가이 허리까지 내려오는 여자가 나를 보며 놀란 듯 눈을 커다랗게 뜨고 말했다.
“어째서지?”
나의 목소리는 공허했다. 메말라 있었다. 아마 질문의 내용과 메마른 어조로 인해 그녀는 무척 당혹스러워 했을 것이다.
“아, 아니. 난 싫다는 건 아니고, 그냥 좀 읽기가 어려워서……. 취향에 안 맞더라는 얘기였지. 네가 그렇게까지 하루키를 좋아하는 줄 몰랐어.”
나는 피식 웃었다. 그녀는 지금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골수 팬인 줄 오해를 하고 있다.
“나도 무라카미 하루키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아.”
담담하게 말했다. 처음인 것 같다.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게.
“그, 그래?”
그제서야 그녀는 약간 안심한 듯이 웃었다. 웃는 모습이 참 예뻤다.
“그럼 누구를 좋아하는데?”
궁금해 졌기에 물어 보았다. 과연 그녀는 어떤 사람일까. 좋아하는 작가는 누구고, 좋아하는 책은 뭐고, 좋아하는 영화는 뭐고, 좋아하는 드라마는 뭐고, 좋아하는 배우는 누구고, 좋아하는 음식은 뭘까.
“응?”
“좋아하는 작가 말이야.”
내가 생각해도 내 목소리는 너무나 삭막하다.
“음… 좋아하는 작가는… 제인 오스틴.”
흠, 제인 오스틴인가. 정말로 좋아하는지, 아니면 그냥 입에서 나온 작가가 제인 오스틴인지 모르겠지만, 제인 오스틴이라는 이름은 내 흥미를 끌었다.
“오만과 편견?”
“응. 엠마가 좋아서.”
흠. 그렇군. 엠마…….
“메텔. 가자.”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정미라는 여자아이가 말했다. 나는 정미가 경멸과 혐오가 뒤섞인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느꼈다. 상관없다. 그런 눈초리는 내게 너무 익숙했으니까.
“어, 알았어. 그럼 다음에 또 보자.”
그녀는 그녀의 친구와 함께 강의실을 나갔다.
나는 천천히 시선을 다시 책으로 돌렸다.
이가 아팠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 1878)
((전략)그렇지만 고독이란 무엇인가? 오늘날 누가 그것을 알 수 있으랴.)
나는 치과의 진료대 위에 멍하니 누워, 낮에 만났던 그녀를 떠올렸다.
나예리. 그녀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메텔이라는 별명으로 더 자주 불린다. 그녀는 정말 애니메이션, <은하철도999>에 나오는 메텔을 꼭 닮아 있었다. 길게 자란 갈색의 생머리, 새하얀 얼굴, 조용한 성격,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수를 담고 있는 맑은 눈. 그녀는 아름다웠다.
“저런. 지난 번보다 이가 많이 상했네요.”
여의사는 라이트의 노란 빛으로 내 입 안을 들여다 보며 말했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평범한 인간사회와는 동떨어진, 이질적인 존재였다. 애시당초 내게는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산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누구도, 심지어는 부모조차도 내가 갖고 태어난 범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예리함과 그에 따른 고통을 이해할 수 없었고 나는 홀로 괴로워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나를 이해하기 보다는 별종, 괴짜로 취급하고 배제하는 편이 더 경제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언제나 외톨이였다. 아마도 내 예리한 감각은 다른 사람들에게 생리적인 경멸과 혐오를 불러 일으켰던 것 같다.
그리고 내 이를 차가운 금속으로 건드리며 내 예민한 감각을 자극하고 있는 이 여의사도 다를 바 없었다. 그녀는 커다란 마스크로 입과 코 주위를 가리고 있었기에 그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표정은 눈뿐이었다. 그 여의사는 자의이 표정관리가 완벽하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그녀의 눈에 떠오른 표정은 나에 대한 명백한 혐오감이었다. 아마 그녀가 이런 직업에 속해서 나같은 사람에게서 돈을 받고 살지 않아도 되었다면, 나같은 인간에게 이렇게 많은 말을 건네는 일은 결단코 없었을 것이다.
메텔……. 그녀라면 어땠을까? 그녀도 다른 사람들처럼 나를 경멸하고, 무시하고, 혐오할까? 아니면 그녀는…… 어쩌면 나를 이해해 줄까?
“차가운 거 먹을 때 이가 많이 시리죠? 치주염입니다. 잇몸이 많이 상했어요.”
그녀는 단단하고 차가운 금속으로 내 예민하기 짝이 없는 잇몸을 무신경하게, 건드리며 남의 일이라는 듯이 말했다.
“양치를 주의해서 해 주세요. 이러다가 진짜 큰 일 날 수도 있어요.”
아, 도대체 이 말이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이 몇 번째란 말인가. 나는 지난 몇 년간 이 치과에 다니면서 그녀와 대화를 나눠 왔으나 지금 그녀가 한 말은 수도 없이 들은 말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녀의 성의없는 충고를 사흘 이상 기억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석 달 후에 또 와 주세요. 충치 치료한 게 도질 듯 말 듯 해요. 조심해서 잘 좀 해 주세요.”
이 말역시 그녀가 수없이 반복해 온 대사 중 하나였다. 이런 식으로 그녀는 치석을 제거한다느니, 치아의 마모상태를 확인한다느니, 염증의 경과를 지켜본다느니, 온갖 핑계를 갖다 붙이며 3개월 후의 환자를 확보해 두는 것이었다. 그리고 분하게도, 양치질을 게을리 하고, 그러면서도 치아에 대해서는 예민한 나로서는, 그것이 치과의 뻔한 상술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3개월 후에 또다시 이 병원을 방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녀는 진료대를 일으켜 세웠다.
“건강 잘 챙기세요.”
그녀의 말에 진심이라고는 털끝만큼도 담겨 있지 않았다.
아, 싫다. 싫어. 가식으로 뒤덮힌 이 세상이 정말 싫다. 이 세상에 진실된 것은 나랑, 내 아픔과 내 예리함과 메텔밖에 없는 것 같았다.
진료실을 천천히 걸어 나가며 나는 집에 가는 도중에 서점에 들러 제인 오스틴 전집을 사기로 마음먹었다.
<짜라투스트라는 그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 1885)
(진정으로 진리의 구애자가 그렇게 없다는 말인가./조용한, 단단한, 원활한, 차가운/입상이 되는 일 없이/신의 원주가 되는 일없이/신의 문을 지키고/신전앞에 앉는 일도 없다./아니!그러한 진리의 입상의 적으로서/어떤 황야에 있는 것도 신전 앞에 있는 것 보다는 낫고/고양이와 같이 방자하게/모든 창문으로부터 뛰어 들어가/홀연! 모든 우상 속에서, 또/모든 원시림 속에서 생명의 냄새를 맡는다./그렇게 원하고 부러워 했던 것의 냄새를 맡는 것은,/원시림에 들어가/오색찬란한 반점이 있는 맹수와 교접하고/죄많은 건강도 아름답게 달리기 위한,/또한, 갈망의 입술을 불어/행복에 취해 조소하고, 행복에 취해 지옥에 떨어져,/행복에 취해,/피에 목마르기 위해서다./약탈하면서, 몰래 다가가면서, 훔쳐 보면서/달리기 위해서다.)
나는 그녀를 지켜보고 있다.
그녀는 지루한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만지고 있다. 정확히는 검지손가락으로 머리칼을 돌돌 말며 수업이 따분하다는 감정을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곳에 있다. 잡고 싶다. 그녀의 탐스럽게 빛나는 블론드색 머리칼을. 솜털이 난 목 언저리를.
얼마동안 나는 그녀를 관찰해 왔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녀는 나와 닮았다.
겉보기에는 나와 그녀는 전혀 닮지 않았다. 그녀는 빼어난 미모로 모두의 선망을 받고 있었고, 나는 모두가 혐오해 마지 않는 ‘괴물’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나와 닮았다. 그녀는 외롭다. 그녀의 주위에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있더라도, 그녀는 본질적으로 혼자였다. 그녀는 누군가를 그리워 하고,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다. 세상에 그 외로움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은 나와 그녀밖에 없다. 바꿔 말하자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나와 그녀밖에 없었다.
“메텔?”
수업이 끝난 후, 나는 부끄럼을 타면서도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외로운 눈이 나를 쳐다 본다. 아마도 나의 눈 역시 그녀의 눈처럼 외로울 것이다. 아마도 그녀는 누군가가 그녀에게 다가가기를 지금까지 기다려 왔을 것이다.
“왜?”
“아니, 그냥…….”
아니, 그냥……. 이라니. 그냥 이름을 부를 리가 없잖아.
“지난번에 니가 제인 오스틴 좋아한다고 했잖아.”
“아… 그거?”
그녀의 얼굴이 놀란 듯이 보였다.
“나도 읽기 시작했는데, 제인 오스틴 좋은 것 같아.”
“응… 재밌지?”
그녀의 반응이 왠지 떨떠름하게 생각되었지만, 이야기를 계속 했다.
“그래. 정말 정말 재밌어. 네 덕분에 좋은 책을 알게 되었어. 고맙다는 말 하고 싶었어.”
그녀는 자리에 앉은 채 나를 올려다 보았다.
“그러고 보니, 너 책 많이 읽는다, 그지?”
아아, 그녀는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수업마다 책에 파묻혀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많이 읽기는 뭘. 그냥 할 일 없을 때마다 읽는 것 뿐인데…….”
“지금 읽는 책은 뭐야?”
“니체의 <선악의 피안>.”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렇지 않아도 큰 그녀의 눈이 동그래 질 때면 그렇게 귀엽고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니체라니. 우와. 대단하다.”
“뭘…….”
“무슨 내용이야?”
그녀의 질문에 나는 좀 당황했다.
“솔직히 말하면, 잘 모르겠어. 니체 이 사람은 도대체 글을 왜 이렇게 어렵게 쓰는지……. 그래도, 말 하는 게 마음에 안 들어. 아무래도 이 사람 시니컬 초코딩인 것 같아. 그러니까 히틀러같은 색기가 이용해 먹었지. 선악도, 도덕도 없다고? 우리의 삶은 영원회귀라고? 영원회귀를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초인이라고? 그렇지만 난 받아들일 수가 없어. 난 약하니까. 초인이 아니니까. 니체라면 원한(ressentiment)에 빠진 천민이라고 부르겠지. 그렇지만, 약한 게 어때서? 원한이 어때서? 천민이 어때서? 그래서 나는 니체를 좋아할 수가 없어. 난 근대적 이성의 노예니까.”
말이 끝나자 그녀는 특유의 깊은 눈망울로 나를 쳐다 보았다. 괜히 썰렁한 말을 한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메, 메텔은 니체 읽어본 적 있니?”
“아니.”
이겼다.
“…….”
“…….”
할 말이 없다. 대화가 끊겼다. 이럴 때는 무슨 얘기를 하면 되지? 여자랑 얘기해 본 경험이 전무한 나로서는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난 왜 메텔이랑 니체에 관한 애기를 하고 있는 걸까. 차라리 메텔이라도 무슨 말을 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녀역시 수줍음을 타는 성격인지라, 그 큰 눈망울을 껌뻑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건 그렇고, 메텔은 무슨 음식이 좋아?”
어쨌든지 대화를 끌어가고 싶던 내가 꺼낸 화제는 이런 것 뿐이었다. ……. 아, 나란 인간은 도대체 왜 이 모양일까?
“응?”
“좋아하는 음식말이야.”
그녀는 한동안 황당한 표정을 짓더니, 작게 웃었다.
“너, 참 재미있는 애구나.”
나도 따라 웃었다.
“난 아보카도가 좋아. 넌 어때?”
“나? 나도 아보카도가 좋아.”
솔직히 얘기하자면 별 생각없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아보카도를 좋아한다고 말한 순간부터 세상에는 아보카도라는 과일밖에 존재하지 않게 된 기분이었다.
“어, 그래?”
그녀는 웃었다. 웃는 모습이 너무 예쁘다.
<선악의 피안에서>(Jenseits von Gut und Böse, 1886)
(진리란 여자다. 라고 가정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모든 철학자가 그들이 독단론자였던 이상, 이 여자를 잘 이해하지 못 했던 것은 아닌가하는 의심도 타당한 것이 아닌가? 그때까지 그들이 진리에 가까이 갈 때, 취했던 상투적인 방법인 놀랄 만한 엄숙함, 보기 싫은 뻔뻔함은 여자라는 것을 길들이기에는 실로 졸렬한, 어울리지 않는 방법은 아니었는가? 여자를 길들일 수 없었던 것도 당연하다.(후략))
나는 철학자가 되고 싶은 생각따위 추호도 없다. 그렇지만 만일 철학자가 되기 위한 첫째 조건이 세간으로부터의 고립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 조건이 여자로부터 인기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고, 셋째 조건이 정리정돈이라는 단어를 혐오해야 한다는 것이라면, 나는 완벽하게 그 조건들에 부합할 것이다. 특히 셋째 조건.
내 방은 어지럽다. 그나마 어머니라는 존재와 함께 살았을 때는 방을 청소해 주기라도 했는데, 지금은 더이상 인간의 거처라고 보기 힘든 상태에 이르렀다. 컴퓨터의 양 옆에는 서류와 책이 산을 이루고 있고, 방바닥에는 서류와 그외 잡다한 물건들이 카펫을 가리고 섬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어지러운 와중에서 나는 침대에 누워 <선악의 피안>을 읽고 있으니, 어쩌면 철학자라는 이름이 내게 어울리는 지도 모르겠다.
각설하고 <선악의 피안>은 어렵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내가 철학 전공도 아니고, 책을 읽어왔다고는 해도, 거의가 쉽게쉽게 읽히는 판타지소설이었기에, 니체의 말을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봤자 <선악의 피안>도 어차피 니체의 뒷담화 험담 모음집에 불과했지만…….
고등학교때 선생님은 니체는 나약한 인간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내가 읽은 니체는 나약한 인간들을 경멸하는 강한 거인이었다. 오히려 나약한 것은 나였다. 다만, 나는 인정하기 싫지만, 어딘가 그가 나와 닮았다는 것을 느꼈다. 예를 들자면, 그의 예리함이다. 니체는 예리하다. 그리고 그 예리함은 내가 나의 예리함때문에 고통스럽듯이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고통이야말로 그 철학의 근원이 아닐까.
니체는 그 예리함때문에 괴로워 했을 것이다. 교수직에서 짤리고, 바그너에게 실망하고, 루 살로메에게 실연당하고, 기독교를 그토록 싫어하고, 평생 타성과의 싸움에 몸을 바치고, 결국 미치고, 죽을 수밖에 없었던 그는 고결한 인간이었다. 어쩌면 그역시도 인간의 정신을 자유롭게 하려 했던 해방자였는지도 모른다.
니체와 달리 나는 예술적 감성을 가지지 못 했다. 어렸을 적부터 예체능과목에는 약했던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너무나 메말라 있었다. 아마 나는 바그너를 사랑하지 못 했을 것이다. 그것이 나와 그의 가장 큰 차이점일런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무심코 이를 악물었다. 왼쪽 아래의 어금니가 아파온다. 그러고 보니 한참 전에 포테토칩을 먹은 후에 양치를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칫솔을 입에 물고 잠시 방을 나섰다. 그리고는 한참을 칫솔로 이를 부벼댔다.
아프다. 가슴이.
방으로 돌아온 나는 프리드리히 니체를 책상위의 책산의 정상에 올려 놓고는 책장에서 제인 오스틴을 꺼내 들었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려고 한다.
<도덕의 계보>(Zur Genealogie der Moral, 1887)
((전략)”나는 괴롭다. 이건 누군가의 탓에 틀림없어” 모든 아파하는 양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목자인 금욕주의적 승려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 양이여. 그것은 누군가의 탓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그 누군가는 사실 너자신인 것이다. 그것은 오직 네 탓인 것이다. 네가 이렇게 된 데 책임이 있는 것은 너뿐이다.”(후략))
오늘도 나는 걷는다. 땅바닥을 내려다 보면서. 이 지긋지긋한 길을.
문득 주위를 둘러본다. 하얀 김이 입에서 나왔다. 두꺼운 점퍼를 껴 입은 사람들이 몸을 움츠리고 걷고 있었고, 나무는 그 앙상한 가지만이 외롭게 떨고 있었다. 이제 겨울은 마지막 맹위를 펼치고 있었다. 머지않아 또다시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또다시 겨울이 올 것이다. 그 돌고 도는 계절의 흐름조차 짜증난다. 세상 모든 것이 역겹다.
그런 내게 단 하나 특별한 게 있다. 그녀다.
“메테-ㄹ”
나는 그녀를 불렀다. 알록달록 빵모자에 털 스웨터를 껴 입은 그녀가 얼굴을 돌렸다. 그녀는 오늘도 아름답다. 다만, 그의 곁에는 남자가 있었다. 그의 얼굴은 꽤 미남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신경쓰지 않고 메텔에게 다가갔다. 어차피 나와 그녀 이외의 존재에는 별다른 관심도 없었기에.
“안녕.”
그녀는 떨떠름한 얼굴로 인사를 받았다.
“어, 그래. 안녕.”
그녀의 곁에 있던 남자는 나를 잠시 쳐다 보더니 말했다.
“메텔. 나 먼저 가 있을게.”
그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메텔, 있잖아. 제인 오스틴 말인데.”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 졌다. 나는 그녀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
“있잖아…….”
그녀가 힘들게 말을 꺼냈다.
“나 요즘 제인 오스틴이 아니라 에쿠니 가오리를 읽고 있어.”
“뭐? 에쿠니 가오리?”
에쿠니 가오리? 도대체 어떻게 제인 오스틴에서 에쿠니 가오리로 이행할 수 있는 거냐.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싫어하면서도 에쿠니 가오리는 좋더냐. 아니, 뭐 에쿠니 가오리라도 상관없지만…….
“그리고 말야.”
그녀는 더욱더 망설이며 눈을 땅으로 내려 깔았다. 그녀의 밑에는 검회색의 아스팔트 바닥만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메텔이라고 부르지 말았으면 좋겠어. 괜히 부담스럽거든.”
부담스럽다고? 나는 멍해졌다.
“알았어?”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확인사살을 가했다.
“어……. 그래.”
나는 마지못해,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얼떨결에, 힘없이, 대답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래, 그럼 안녕. 다음에 또 보자.”
그녀는 그렇게 사라졌다. 잡을 수 있는 곳에 있었던 그녀는 점점 멀어졌다.
결국은 그녀도 그런 여자였다. 그런 인간이었다. 나와는 다른, 나와는 이해할 수 없는, 나와는 섞일 수 없는 그런 부류의 인간에 불과했다. 결국은 그녀도 나를 버린 것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그래, 그런 것쯤은 각오하고 있었던 일이다. 애시당초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나를 이해해 주기를 바란 적은 없었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갈 때, 항상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슬프다.
가슴이 아프다.
나는 세상에 혼자였다.
그래, 원래부터 혼자였지 않은가. 모든 것은 내 착각이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난 영원히 혼자였다. 아----------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가 내 이가 아닌 것처럼 아파왔다.
<우상의 황혼>(Götzen-Dämmerung, 1888)
((전략)그 가장 소원한 여러 문제들에 대해서조차 생 그자체에 ‘그렇다’라고 단언하는 것, 그 최고의 전형을 희생으로서 바치면서 내자신의 무진장함에 광희하는 생에의 의지- 이것이야말로 나는 디오니소스적이라 이름붙이고, 이것이야말로 나는 비극적 시인의 심리학에의 다리로서 달성하고 싶다. 공포나 동정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격렬한 폭발에 의해 위험한 욕정으로부터 몸을 깨끗이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게 해석했었지만- 그게 아니라, 공포나 동정을 넘어서 생성의 영원한 쾌감, 그 자체가 되기 위해서이다. 부정으로 느끼는 쾌감마저 그 자신 속에 내포하고 있는 그 쾌감과… 그리고 이로서 나는 일찍이 내가 거기서 출발했던 구절을 다시한번 짚고 넘어가게 된다. <비극의 탄생>은 내 최초의 모든 가치의 가치전환이었다. 즉, 그것으로 나는 내 의욕, 내 능력이 거기서 자라난 땅에 다시한번 몸을 놓는 것이다. 철학자 디오니소스의 마지막 제자인 나는, 영원회귀의 교사인 나는…….)
부귀니 명예니 하는 대단한 것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단지 나를 이해해 줄 사람, 그것 하나만 있었으면 그걸로 충분했을텐데, 그것마저 내게는 너무 과분한 욕구였던 모양이다.
집에 들어온 내 눈에는 이제는 낯익어 버린 어지러움이 들어왔다. 이제, 이 방을 감히 ‘청소’하겠다는 생각은 버린 지 오래였다. 특히나 오늘같은 날은 저런 일에 신경쓸 기력조차 없다.
나는 책상으로 가서 읽고 있던 제인 오스틴의 페이지를 열었다. 그리고 어제 읽었던 곳부터 읽기 시작했으나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읽는 게 읽는 게 아니었다. 곧 나는 책을 닫았다.
“하아------------“
가슴이 아프다.
나는 냉장고에서 아보카도를 꺼냈다. 껍질이 검붉다. 왼손에 아보카도를 들고, 오른손에 든 과도를 아보카도의 과육 깊숙히 찔러 넣었다. 아보카도의 중심에 핵처럼 심어져 있는 거대한 씨앗에 과도가 당도한 것을 느끼고, 과도를 180도 돌렸다. 그러자 아보카도는 양분되어 그 초록색 과육을 보였다. 일단 안에 있는 황색의 씨앗을 빼냈다. 그리고 스푼으로 아보카도의 과육을 파 내 입에 넣었다.
이가 시리다. 과육이 어금니와 잇몸 사이의 치육에 붙는 순간, 나는 아픔을 느꼈다.
나는 아프다. 아보카도의 과육에 잠식당한 잇몸이. 지난 밤, 잠결에 깨물어 버린 혀가. 책과 컴퓨터에 찌든 눈이. 타성과 욕망과 의미와 고뇌에 병든 정신이. 그리고 가슴이.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삶은 너무나 괴롭다.
내 눈에 문득 테이블 위에 있는 아보카도의 녹황색 과육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과도가 들어왔다.
나는 과도를 손에 쥐었다.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1900년 8월25일 죽었다.
그리고 나는 니체가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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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6월24일은 제인 오스틴을 좋아하고,
요구르트를 좋아하고,
우수에 찬 눈이 예뻤던,
멀지 않은 곳에 있었지만,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었던,
한 친구의 생일입니다.
…….
예. 일기는 일기장에.
독후감은 독서기록장에.
연애편지는 편지지에!
뻘글은 판갤에!
p.s.2 근데 워드에서 쓴 걸, 복사해서 붙여넣으면 문장 앞에 인덴트가 안 되네요.
뭐, 그러려니 하지만.....
p.s.3 본문에서 니체 인용문은 ちくま学芸文庫의 니체전집시리즈를 제가 임의로 번역한 것입니다.
틀릴 지도 모르니 양해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