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울 파스타치오는 잠을 자고 있었다.
꿈에서 한 숫자를 보았다. 3272... 어쩌구 하는 숫자였는데 그 이상은 생각나지 않았다. 무슨 숫자
일까? 별 볼일없는 한줄의 숫자였지만 라울은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한참동안 고민을 했다. 직장
에 나가서도 이 고민은 사라지지 않았다. 벽에 새겨져있던 회색의 숫자 덩어리, 3272... 어쩌구. 대
체 무슨 의미지?
라울은 작업을 하다말고 테라스로 나가 담배를 피우면 곰곰히 그 숫자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숫자의 행렬은 머리속을 줄줄이 타고 흐르다가 손끝에 잡힐만 하면 물방울 처럼 줄줄이 빠져나가
버렸다. 남은 것이라곤 공상의 찌꺼기 뿐이었다. 라울은 생각을 진행하면 할 수록 힘겨워졌고 머리
속이 복잡해 지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숫자를 생각해낼 수 없자 라울은 그 숫자를 잊어버리기로 했다. 하지만 이미
숫자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그의 머리 속에 낙인처럼 박혀있었다.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해봤지만 그
의 머리속에 남아있는 것은 귀여운 애인, 작업 후 친구들과의 저녁 약속 대신 더욱 더 또렷하게
3272에 대해 생각 할 수 있게 된 머리였다. 라울은 이 숫자에 대해 잊기 위해 자신의 작업실로 향했
다.
저녁이 될 무렵, 한창 작업을 하던 라울은 어느 순간 자신의 컴퓨터 모니터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
랄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컴퓨터에는 아무 작업도 진행되어 있지 않았다. 오로지 32726이라는 숫
자 뿐이었다. 3272 다음의 숫자를 기억해낸 것이다. 라울은 자신이 하루종일 아무런 일도 못했다
는 것보다 그 숫자를 기억해냈다는 것에 뛸 듯이 기뻐했다.
그 순간 라울은 자신이 인생의 어느 순간 때보다 지금 이 순간이 기뻤다. 어쩌면 그는 이 숫자에
자신의 인생의 의미가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신이 자신에게 이 숫자에 대해 알려주기
위해서 꿈으로서 계시를 내려준건지도 모르고, 이 숫자에 우주의 비밀이 숨겨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신이여, 다음부터는 좀 더 똑똑한 머리도 함께 내려주길 바래요.
라울은 혹시나 그 꿈을 다시 꾸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유달리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섯시였
다. 너무 이른 시각인 탓에 잠이 오지 않던 라울은 그 숫자에 대해 곰곰히 생각했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세계를 움직이는 공식? 숫자니까 어쩌면 뭔가의 비밀번호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복권 당
첨 번호라던가... 굉장한 의미가 담겨있을 것은 분명하다. 숫자 하나로 이렇게 큰 기쁨을 주는 건
하늘의 위대한 분밖에 없을테니까.
라울은 꿈을 꿨다. 3272671까지 봤다. 실은 그 숫자를 전부 다 보고 반드시 외우겠다는 다짐으로
꿈속에서 몇번이나 읽었지만 숫자들은 마치 눈속에 들어온 먼지처럼 그의 초점에서 벗어나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기껏 외워버린 숫자들은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먼지처럼 부스러져버렸다. 알을 깨
고 남은 알맹이는 3272671까지였다. 라울은 바로 머리를 감싸쥐고 고민했다. 그 뒤에 있던건 8이
던가 0이던가. 저주스러운 그 글자는 머리속에서 미토콘드리아처럼 제멋대로 모습을 바꿔대며 라
울을 희롱했다. 고작 숫자따위에게 농락당할 줄 몰랐던 라울은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참을수가 없
았다. 숫자를 두개나 더 알아냈지만 그에게 찾아온건 분노뿐이었다.
당신을 저주합니다. 신이여, 저를 가지고 장난치겠다면 두개가 적당하군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면 꿈속엔 더이상 답이 없을거라고 생각했을것이다. 하나라면 나름대로 만
족했을 것이다. 그 다음을 기약할 수 있을테고, 셋이라면 더할나위 없이 만족할 수 있을 것 이다.
하지만 둘은 이미 숫자에 대한 욕심으로 허덕이는 라울에게 더욱 더 큰 욕심을 부추기는 기름이었
다.
라울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담아 종이에 펜을 대고 갈기갈기 찢어버리듯이 3272671을 적었다.
날카롭게 적힌 일곱개의 글자가 사탄의 비웃음을 담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라울은 악의가 가득
차올라 바들바들 떨리는 손가락을 간신히 붙들어 매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한번 더 잔다면 숫자가
떠오를지도 모르지만 더이상 자고 싶지 않았다. 그는 꿈에서 깸으로서 세상에 둘도 없는 상실감과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은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두번다시 그런 감정을 겪고 싶지 않았다.
꿈 속에서 그 숫자를 보고 있을 때 만큼은 어느 때 보다도 행복한 감정을 느꼈었다.
라울은 그 순간 자신의 감정을 눈치챘다.
오. 맙소사, 이건 사랑이야!
자신은 한줄의 숫자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이 감정이 진짜라면, 그건, 정말, 멋지잖아!
숫자를 하염없이 생각하고 있으면 그저 그것만으로도 기뻤다. 그 숫자를 위해서라면 여생을 바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숫자와 떼놓는 것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강제로 떼어놓는 가문들과 같았
다. 숫자의 모든 것을 알 수만 있다면 기꺼이 내 심장에 단검을 꽂고 영혼마저 죽일 수 있는 독약을 마시리.
다음 순간부터 라울의 모든 것은 3272671...의 다음을 위해 기꺼이 바쳐져 있었다. 우선 자신이
하던 작업들은 모조리 정리해버리자. 수많은 문서와 종이조각들이 쓰레기통에 처박힐 것이다. 도
저히 버릴 수 없는 것들은 창고로 몰아 넣어야겠군. 전 재산을 털어넣어 자신이 꿈에서 봤던 풍경
과 최대한 비슷하게 만드는거야. 방에는 그만한 공간을 만들수가 없으니까 방과 거실의 벽을 허물
어 만들어야 겠군. 이제 더이상 친구는 초대 못할테지만, 무슨 상관이람!
이제 머리속에 숫자밖에 없는 라울은 다른 사람에 대한 생각이 없었다. 그의 이지는 오로지 숫자만의 것
이었다. 3272671... 또한 그만의 소유였고, 그밖에 알아낼 수 없는 세계의 비밀이었다. 신은 그에게 귀한
운명을 주었다.
우선 자신의 작업도구들을 쓰레기통에 처박기로 한 라울은 책상위의 문서들을 기세 좋게 싹 쓸어 바닥으
로 쏟아부었다. 와라라락! 시원하게 쏟아지는 종이 조각들을 보며 라울은 희열의 미소를 지었다. 컴퓨터의
코드를 기세좋게 뽑으려던 라울은 잠시 주춤했다. 그게 망가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라울은 일단
작업하던 파일을 저장하고 컴퓨터 전원을 껐다. 잠깐, 왜 저장한거지? 어차피 버릴거잖아. 숫자에 대해 고
민하는데 컴퓨터는 필요없어. 하지만 라울은 다시 또 술렁였다. 과연 몇십년 동안이나 해온 일을 뿌리채
뽑아내는데는 무리가 있었다. 시작부터 자신과의 싸움에 부딪친 라울은 잠시 고민했다. 사랑에 빠졌다지
만 그런 일을 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아침 밥을 먹기 전부터 그의 감성은 이성적으로 생각할 만큼 식어있
었다.
할 수 있을리 없잖아. 벽을 부수고 그런걸 만들고 하는거.
생각해보면 그림을 그린다던가 아니면 새하얀 종이에 글자를 끄적이는 것만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쓸데없이 거창하게 생각했군. 라울은 자신의 경거망동에 헛웃음을 날리며 작업하던 문서를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정리해 두었다. 차갑게 생각해보자 숫자가 그리 커다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
했다. 숫자에 대한 열정은 이제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차갑게 식어버린 스파게티처럼 닝닝한 모습으로 머
리 안쪽에 앉았다.
라울은 조용히 자신이 숫자를 적은 종이를 들어올려 바라보았다. 3272671...9.
눈을 크게 뜨고 다시 종이를 바라보았다. 종이에는 정확히 32726719라고 적혀있었다. 그 순간 꿈의 풍경
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분명했다. 자신이 8인지 0인지 고민했던 그 숫자는 9였다. 갈기듯이 써올리면서
끝부분이 기묘하게 휘어진게 우연히 9모양을 만든것이다. 처음에는 그게 숫자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 모습
을 보자 분명하게 확신했다. 그것은 9였다. 더할 나위 없이 의심할 필요없는 9. 이제 숫자는 여덟자리가 됐
다.
라울은 이제 크게 동요할 수 밖에 없었다. 포기하려고 하자 이제 이런 식으로 '상징'을 안겨주었다. 잡힐
듯 말듯하며 이 한줄의 숫자는 그를 몇번이나 얽매고 끌어당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