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컬드 박물관의 우울
-A. H. 모모
-나는 내가 좋아하는 여자의 이름조차 모른다. 엣 추리 소설에나 나올법한 이야기지만,
어쨌든 모른다.
「그녀가 이곳에 왔었다구요? 이름은 아나요?」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이니셜은 알고있습니다. A. H.이었습니다.」
그녀는 모모이다. 이니셜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모모이다.
나의 모모.
스무살이 된 지금 내 손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막 견습기사가 되었을
시절의 나는, 많은 것을 내 손안에 움켜쥐려고 애쓰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의 일부분은 나를
위해 고스란히 남겨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바닥물처럼, 내 손가락 사이를
소리도 없이 조용히 빠져나갔다.
여기서부터 시작해보자.
나는 미혼의, 대륙에서도 몇없는 변변찮은 오컬트 박물관의 소유주이다.
오컬트 박물관이란 온갖 언데드 박제와 유령따위를 전시해놓는 곳을 일컫는다. 시체나 저주
따위의 마법 글귀들은 당연히 교육상 좋을 턱이 없고 관람객 입장에서도 뭔가 얻을 만한것이
있을 턱이 없다. 그래서 대개의 오컬트 박물관은 금방 폐쇄되지만, 내 박물관의 경우엔 발이
워낙 넒어서 친구들의 지원금이나 희귀종 보호에 대한 국가의 보조금으로 그나마 꾸려 나갈수
있었다.
'몇 안되는' 오컬트 박물관은 대개 역사가 깊고 희귀한 언데드가 많아 일부 매니아의 지원금
으로 유지된다. 그리고 그런곳에서는 마이너스적 기운이 땅속 깊이 파고들어 '진짜' 유령을
볼 수 있기도 한다. 그리고 지금 나에겐 만인의 눈썹을 찍어누르는 졸음이라는 유령이 내 눈꺼풀
끄트머리에 매달려 있다.
대리석 바닥이 벌떡 일어나 내 머리를 쥐어박았을때 나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숨소리도 느껴
지지 않을 정도로, 죽은 듯이 잤다. 그렇게 자고 있는 동안에 머릿속에 빈 곳이 생겨서, 그 윤곽
을 확실히 느낄 수가 있었다. 따뜩하고 건조하고 어두운 공동이다. 그 안은 친밀하고 따스한
공기가 가득 채우고 있다.
대리석 바닥이 어떻게 일어나 의자에 앉아있던 내 머리를 가격했는지 궁금하기 시작할때 내
머리는 온통 웅웅대는 소리로 내 코앞에서 운석이 떨어진다하더라도 깨달을 수 없을것 같았다.
귓속을 울리는 비명같은 소리덕분에 대리석 바닥의 관심사는 내게서 멀어졌다.
누군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귓속을 울리는 진동음이 비명이라는걸 깨닫기 전까지는 의자를 일으켜세우고 머리를 털어내기
까지 한참걸렸다. 비명은 단발적으로, 혹은 산발적으로 웃음과 함께 튀어나왔다. 시끄러웠지만,
관람객중 아무도 동요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유령이 우는가보지'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 앞의 여학생 세명이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무엇이 무섭고 무엇이 우스운지 비명과
함께 까르르 웃으면서 손뼉을 쳤다.
문득 시비를 걸고 싶어졌다.
「야」
「에?」
「시끄러워.」
「......」
소녀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하지만 약간 민망했던지 조용히 이곳저것을 둘러보다가 발
빠르게 나가버렸다. 박물관 안의 공기가 어색해졌다. 나는 졸다가 떨어뜨린 책을 주워들고
의자에 다시 털썩 앉아서「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읽었다.
오컬트 박물관의 우울
-내가 원하는 것
'나는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잘 모르지만, 지금의 기분으로서는, 아주 강력한 것. 지금의
썩어빠진 일상을 단숨에 때려부술 만큼 강력한 그 무엇이 나와라.'
나는 책장의 가장자리를 접고 덮었다. 박물관 입구에는 한 여자 엘프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무거운 가방을 잔뜩 들고 있었다. 양손에 들고 어깨에 매고, 성큼성큼 다가와서 내 앞에
가방들을 '탁' 하고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두르고 있던 회색 목도리를 풀어서 내 옆의 빈자리에
놓았다.
그것은 잠시동안 의자위의 잠든 고양이처럼 얌전하게 놓여 있었다. 그 잔털 위에 기분 좋고
푸근한 공기 덩어리가 떠돌고 있었다.
멍하니 목도리를 지켜보고 있는데, 그녀는 자리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이 커다란 검은색 여행가방
위에 털썩 앉았다. 그러고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뭐야, 이여자는.'
키가 작은 그 여자는 맞지도 않는 커다란 옷을 입고 있었다. '빗 따위는 최근 삼 년 동안
써 본 일도 없어.'라고 말할 것 같은, 부스스한 짦은 머리, 눈이 둥글고 크다. 나는 그녀를 보고
문득 모모를 떠올렸다.
『모모』 에 나오는 시간을 되찾아 주는 소녀.
"뭐야."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발음된 내 말은 마치 씹어 뱉은 듯한 불쾌한 소리였다.
"저, 신을 믿어?"
수도원 같은 데서 전도하러 나온 애인 모양이다.
"교회 안 다녀."
"다행이네. 얘기가 통하겠군. 봐, 신은 뭔가 책임을 져야 옳아. 무의미하게 살다 억울하게 사라
진 수많은 인간이나 해삼을 생각해봐."
'해, 삼?' 나는 머릿속으로 한 글자씩 끊어서 발음해 보았다.
"해삼?"
"그래."
나는 잠시 어두운 바닷속에 던져져 있는 해삼을 생각했다. 그것은 소름 끼치도록 적막한 광경
이였다.
"몇 살?"
"음."
"난, 스묾 한 살."
그렇다면 나보다 두 살이나 많다.
"어, 전 스묾이요."
"기사야?"
"아뇨, 예전에... 어떻게 알았어요?"
"제복에 그렇게 쓰여 있잖아. 'Moody stone knights'"
그녀는 싱글싱글 웃었다. "실력이 대단한가 봐? 명성이 자자하잖아."
"그 기사단 대단치는 않아요. 나같이 실력없는 사람도 있고. 전 행정관에 가까웠어요."
"무디 스톤 나이츠의 행정관? 국군정보국?"
어, 민간인 중에도 그걸 아는 사람이 있나보다. "난 말야, 칸드웰 아카데미 나왔어."
칸드웰 아카데미라면 공무원과 정보국 요원을 많이 배출하기로 유명한 학교이다.
"에? 그런데... 왜 공무원이 되지않았어요? 무슨 사정이라도 있어요? 저, 병이라던가..."
"설마. 그냥, 자기 한 몸을 확실히 책임질 수 있는 인간이라면 확실히 훌료한 어른이라고 생각
해서, 꼭 공무원 따위는 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사실상 그 학교에서 십년을 버틴 것만 해도
기적이라고 생각해, 나같은 불성실한 방랑 체질은. 그래서 집에도 학교에도 말하지 않고, 공무원
고시 보는 날 클로비스 시 못박힌 광장 변두리에 가서 하루 종일 강을 바라보면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읽었어. 그 소설은 문장까지 외울 수 있을 정도야. 뭐, 나중에 경쳤지만.
그러니까 공무원 따위가 되지 않고도 보란 듯이 멋지게 살아 주겠다고 결심했어. 잘 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얼굴을 활짝 펴며 웃엇다.
"헤에... 굉장하네요. 누나."
나는 그녀의 페이스에 말려들고 말았다. 어쨋거나 엉망이었던 기분이 상당히 좋아지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사람인거다.
오컬트 박물관의 우울
-센더 알라카고 강
「자,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나랑 놀아주지 않을래? 제복을 보아하니 여기 직원인것 같은데
그냥 아파서 집에 갔다고 하면 되잖아.」
「에?」
「자, 가자!」
어쩌다보니 그녀에게 손목을 붙잡혀 바로 출구로 나가버렸다. 애초부터 관장이 딱히 박물관을
지킬 필요도 없고, 눈치 볼 사람도 없지만 왠지모르게 곤란하다는 생각을 하다가 잊어 버리기로
했다. 이 화려한 사건은 나의 먼지투성이의 생활에 새롭게 불어온 바람이다. 기다려 오지 않았
던가.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그녀의 아무렇게나 감은 회색 목도리가 산뜻했다. 그녀는 내가 좋아하는 타입의 여자아이
(긴 금발의 생머리, 말이 없고, 얼굴이 흰)는 아니었지만, 다른 의미에서 호감이 갔다. 나는
속으로 그녀를 모모라고 부르기로 했다.
기차에 타고, 모모는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돌아보았다.
「아, 오늘 신문 봤어?」
「아뇨.」
「즈믄오름 고봉 흔들바위가 떨어졌데.」
「엇?」
「휴가를 받은 육군 한 무리가 즈믄오름 고봉에 놀러 갔는데, 흔들 바위를 보고는 다들 달라
붙어서 열심히 밀어 댔다는 거야. 그리고... 쿵.」
「으아, 아까운데. 흔들바위 상당한 명물이였잖아요. 아카데미 다닐 때 가본게 마지막인데,
그때는 제데로 밀어보지도 못하고. 정말 그랬어요?」
흥분해서 떠들고 말았다.
「거짓말이야. 당연하잖아.」
씨익 웃었다. 나도 어이없어서 그냥 웃었다.
「그리고, 말놓아도 좋아.」
「정말요?」
「그럼.」
모모가 내린 역은 클로비스 시였다. 그녀는 나를 끌고 죽 걸어서 센더 알라카고 강 주변의 못
박힌 광장 (그녀가 공무원 고시날 있었던)으로 데리고 갔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못박힌 광장'
같은 이름을 붙였는지 알 수 없었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극히 '강변'적인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이쪽과 저쪽을
작은 나무 다리가 잇고 있었다. 바람은 어디인지 짐작할 수 없는 방향에서 기습적으로 잠깐씩
불어왔고, 말뚝위에서 졸고 있던 멍청해 보이는 커다란 새가 우리를 보고 느릿느릿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그녀는 대충 걸치고 있던 회색 목도리를 목에 둘둘
감았다. 나는, 추운 겨울 여기서 그녀가 소설책을 열심히 읽고있는 광경을 상상했다. 분명히
공무원이라든가 미래라든가 하는 시시한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었을 것이다. 순수하게, '뷰티풀
월드' 를 경험하고 있었을 것이다.
「좋아, 이번에는 너에 대해서 들어 볼까? 아무 얘기나 좋으니까 해봐.」
「음... 나는 좌뇌가 없어.」
그녀는 웃었다. 하지만 그 말은 진심이였다. 나는 지금 단순한 수 계산조차 제데로 못하는 상태
였다. 정보부에서 탈퇴한 이후, 뭐든 하려고 책상앞에 앉으면, 머릿속에서 한 가지 감각이
커다랗게 팽창했다. 어떨 때 그것은 가벼운 솜 같은 것이었고, 가끔은 차가운 바람이나 미끌미끌
한 거품이었다. 그럴때 나는 내가 미치지나 않았나 의심하곤 했다. 나는 남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깊숙이 썩어 있어서 다시 원상태로 돌려 놓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나는 좌뇌가
정말 썩어 없어졌다고 그냥 믿어버리기로 했던 것이다. 그 편이 훨씬 편했다.
머릿속의 어두운 빈자리에서는 회색의 무거운 바람이 불어왔다. 그것은 이상하게도 냉장고에
오래 방치해 둔 초콜릿을 떠올리게 했다. 딱딱하게 굳어 있고, 너무 오래되어서 어떻게 해 볼
수도 없는 종류의 무감동한 냉기가 감돌고, 표면이 하얗게 일어나 있는 것이다.
그녀는 한참을 웃더니 생각에 잠겼다. 나는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 얼굴은 자신에게
몰두한 사람 특유의 진지한 그림자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갑자기 모모가 벌떡 있어났다.
「나, 네가 마음에 들었어.」
「에?」
「너 전화번호 있지, 번호 가르쳐줄래?」
그녀는 집이 없었다.
오컬트 박물관의 우울
-도마뱀
우리는 그 이후에도 계속 만났다. 모모는 작가 지망생이었다. 그녀는 멋있는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었고, 나에게 좋은 소설책들을 빌려 주기도 했다. 자연히 나는 박물관 관리에 집중할 수는
없었다. 확실히 소설 같은 걸 거절하지 못하는 걸 보면 나는, 기사단 검술사범이 말한대로 의지
박약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처럼 비참하게, 나이 든 다음의 후회 따위는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내가 어떻게 되든, 그것은 나란 인간이 결국은 닿을 수밖에 없는 종착지인 것이다.
그것은 수많은 가능을 내포하고 있는 듯 해보이지만, 결국 내가 닿는 곳은 하나뿐이다. 그것은
슬픈일이지만, 사실이다. 그리고 나는 이대로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나는 시스템을 비판할 기력도 없었다. 나는 무력한 인간이었다. 그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저항은 정보부 사표를 내는 것. 상상 속의 나는 수십 번도 더 사표를 내 봤을 것이다.
결국은 한번도 해 본일이 없다. 타의에 의해 정보부에서 쫓겨나고 말았지만, 모든 인간이 같은
길을 걸어 같은 종류가 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난 그것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킬 수 없었고,
심지어 나 자신에게도 납득시킬 수 없었다. 그녀는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세계를 최대한
체험하려고 했다. 진정한 세스트럴스 사람처럼 세상을 걷고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불안정했고,
내가 보기에도 철이 없어 보였다. 이 거친 세상을 만만하게 보고있는 것이다. 안 그러면 보장된
공무원 직위를 걷어 차는 짓 따위는 할 수 없다.
하지만 뭐 어떤가.
많이 헤메고, 많이 울고, 많이 웃고.
결국은 그녀 나름대로의 강한 인간이 되었다.
이상하게도 모모는 내 이름은 묻지 않았다. 나도 굳이 모모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서로 부른
다거나 할 일은 어차피 별로 없었기 떄문이다. 그래도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모모는 자유
로운 사람이어서, 아무한테도 할 수 없었던 이야기 (가끔은 야하거나 이상한) 도 할수 있었다.
우리들은 머리를 맞대고 끊임없이 상상을 했다. 그녀와 이야기하는 것은 멋진 일이었다.
만나면 우리는 걷고 걸었다. 내릴 전동차역을 정한 다음에 종이를 세모꼴로 접어서 바닥에
던지고 종이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갔다. 자연히 못적이 없었던 우리는 많이 헤메고,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 인생 백년 마흔이 되가는 이에게는 어마어마한 희생이였다.
하지만 그것은 즐거운 일이였다.
날씨는 매일 조금씩 따뜻해져 갔고, 우리의 복장도 점차 가벼워졌다. 그러나 모모는 늦봄이 다
되어 가도록 목도리를 하고 다녔다. 많이 걸어서 더워지면 풀어서 가방에 리본모양으로 묵었다.
「왜 아직도 목도리를 해? 안 더워?」
「아, 아끼는 목도리라서, 아직 옷장에 집어넣기 싫어. 곧 집어넣어야 겠지만. 아, 덥다.」
모모는 특이하다.
내게는 몹시 귀엽게 보인다. 연상이지만.
어느 날 모모는 번화가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한곳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쫓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쫓아 내 시선이 닿은 곳은 한 옷가게의 간판이었다. 그 이름을 처음
들어 보는 것으로 보아 그렇게 유명한 옷가게는 아닌 모양이었다.
「저것 봐. 저 도마뱀 엄청나게 불길해보이지 않니?」
간판의 색깔은 옅은 노란색이였다. 간판의 중앙에는 기묘한 각도로 꼬리가 뒤틀린 주황색의
도마뱀이 있었다. 그저 회색의 그림자같은 평면적인 도마뱀 그림이었다. 도마뱀의 머리는 밑을
향하고 있었고 꼬리는 머리에 비해 굵었는데 그것이 묘한 불길함을 화면 전체에 던지고 있었다.
오컬트 박물관의 우울
-모모의 소설
내가 처음 읽은 모모의 소설은 벚꽃에 관한 단편이었다. 못박힌 광장 벚꽃 축제를 보고 와서
썼다고 한다. 한밤, 다들 어딘가의 무슨 수용소로 끌려간다. 수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
들이다. 미래도 전망도 없는 그들은 끝도 없을 것 같은 강변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면서도,
도시의 불빛속에서 한밤을 날고 있는 눈처럼 하얀 꽃잎들을 황홀한 눈길로 올려다 본다.
그러나 아무도 감탄사를 발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이런 얘기였다.
아름다우면서도 깨끗한 이야기이다. 슬프면서도 지나친 감정이 흐르지 않는다. 묘사도 멋지다.
분명히 뛰어난 무언가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그녀의 소설은 전체적으로 봤을
때 그렇게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요컨데 균형히 맞지 않았다. 어느 부분이 특별히 확대
되어 있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모모에게 해 주었더니, 모모는 잠깐 심각한 표정을 생각에 잠겼다.
「음, 그건, 내 일부가 지나치게 확대되어 있다는 뜻일까?」
「그럴까?」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그건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그날 전에 없이 떼를 썼다. 전동차로 아홉 역이나 되는 거리를 걸어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아카데미 학생 때 전동차로 자주 다니던 길이라 길은 찾을 수 있었지만 기가 질렸다.
하지만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결국은 내가 져서 걸어가기로 했다. 모모는 톡톡 돌을 차면서
걸었다.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이봐, 나 새 소설을 써 보려고 하는데. 좀 들어봐줄래?」
「좋아.」
「그러니까, 어둠 속에 살소 있는 도마뱀들에 관한 얘기야. 그때 십자거리에서 봤던 옷가게
의 간판에 그려진 도마뱀을 상상하면 되.」
「도마뱀?」
「도마뱀들은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아. 그저 어둠 속에서 우리들을 빤히 지켜볼 뿐이지.
그들은 어두운 곳이라면 어디에나 있어. 벽장 속이라든가 밤의 골목길이라든가 책상 밑에 그림자
처럼 숨을 죽이고 숨어있는거야.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 그저 어두운 곳을 찾아 끊임없이
돌아다닐 뿐이지. 그리고 그들은 우리를 응시하는 거야. 조용히. 아무해도 끼치지 않지만
불길해. 아무도 모르지만 나만은 그걸 알 수 있는 거야. 그런 얘기야.」
「......」
「도마뱀을 바라보고 있으면, 나는 어딘가 터무니없이 과장된 존재처럼 느껴지는 거야.」
우리는 녹초가 되어서,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우리는 어린애처럼 아이스크림을
서로의 코끝에 묻히면서 장난을 쳤다.
「이번 소설은 대박이겠는데, 누나!」
「그래? 멋있지, 멋있지!」
행복한 봄이었다. 내 인생에서 제일 즐거운 봄이었던 것 같다. 유치한 얘기지만, 원래 바쁠 때
놀아야 재미있는 법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행복한 시절이 그렇듯이, 그 스묾의 봄도 나름의 어두운 그림자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행복한 사람이 그렇듯이, 나는 그 그림자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오컬트 박물관의 우울
-화푸는 법
근위기사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견습기사에서 행정관이 되버렸다.) 아카데미 예비 시험을
본 날, 나는 매우 우울했다. 작년보다 평균 포인트가 50포인트 하락했다. 이대로라면 아카데미
에는 지원할 수 없을것이다. 예상했던 결과지만, 그래도 자신이 실망스러웠다.
제기랄, 이럴수가. 모모를 만나서도 잔뜩 부어있었다. 비까지 잔뜩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편의점 앞에서 비를 피했다.
「겨우 예비 시험을 가지고 그렇게 화를 내고 그래.」
「보통 사람이라면 화내는 게 당연하다고.」
「나는 화가 나면 어떻게 하는지 알아?」
그녀가 내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눈은 어쩐지 굉장히 불투명했다. 그 눈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금빛자루거리의 『사랑, 믿음, 무한한 기쁨』이라는 카페알지? 거기서 그, 이상한 맛
아이스 크림있잖아. 늙은이들을 겨냥하고 만든거라고 하는거. 그걸 컵중에서 제일 큰 사이즈,
그...」
「그랜드파더랑 빅 대디 사이즈.」
「그래, 빅 대디를 사는 거야. 그걸 그랜드파더 맛으로만 가득 채워서 사 갖고 나와서 마음
내키는 데 가서 전부 퍼먹어 버리지. 나라면 고춧가루를 조금 뿌릴거야. 단걸 싫어하거든. 비
오는 날이면, 뭔가 따뜻하고 지붕이 있는 곳에서 먹고, 날씨가 따뜻하면 무료 동물원에서
동물들을 보면서 먹는 거야. 그도 저도 안 되면, 집에서 울면서 먹을 수도 있지. 하지만 어쨌
거나 그걸 다 먹는다니 굉장하잖아? '이걸 다 먹다니 굉장하군.' 하고 자기 자신이 자랑스러워
져서, 기분이 분명히 좋아질거라고.」
다른 맛도 아니고 그랜드파더 맛을 빅대디 사이즈로 먹는다니, 먹다가 죽을지도 모른다.
「몇 번이나 해 봤어?」
「한 번도 안 해 봤어.」
「에?」
그녀는 내 얼굴을 쳐다보면서 싱글싱글 웃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화를 잘 안 내게 되. 빅대디 사이즈라니, 그게 보통일이야? 가끔
엄청나게 화를 내 주고 시은 인간이 생겨도, '너 같은 녀석 때문에 빅대디 사이즈를 먹기는
아깝지.' 하고 웃어넘기는 거야.」
「보통의 여자도 누나같이 생각을 할까?」
「'이런 빅대디보다 못한 인간...' 하고?」
「휴, 그래.」
「그래도 기분이 안 나아지냐?」
「글쎄......」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일을 하면 기분이 좋아지지 않을까? 너, 스묾씩이나 넘어서도 담배
한번도 안 피워봤지?」
「에, 당연하지. 범법행위잖아.」
「좋았어, 내가 오늘 담배 가르쳐 줄게.」
「아, 곤란해...... 담배라니, 그거 마약이라고. 국가에서 금지하고 있다니까.」
「이봐, 오늘 한 대만 주고 다시는 안 줄 거야. 담배는 마약이 아니야, 하나의 의식이지.」
「의식?」
「'담배 놀이'라고 이름 붙이면 좋을까?」
그리고 그녀는 천진난만하게 씨익 웃었다. 그 얼굴에 뭔가 잔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담배라니.
오컬트 박물관의 우울
-최소한의 불행
비 오는 날의 공원에는 아무도 없는 것이 정상이리라고 무의식 중에 생각해 왔는데, 의외로
사람이 많았다. 가설 무대 안쪽에서는 서너명의 학생들이 비를 피하고 있었고, 비옷을 입고
자전거를 탄 남자 ㅡ대체 그들은 어디로 가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ㅡ 몇 명이 빙 돌아
지나갔다.
한 떼의 노동자들이 우산도 없이 자기들끼리 뭔가 얘기를 나누며 우리를 지나쳤다. 그들은
어쩐지 탄광 노동을 끝내고 집에 돌아가는, 세상에 불만이 많은 일곱 드워프처럼 보이기도 했다.
비옷을 입은 한 부부가 막 꽃을 피기 시작한 살구나무 아래서 작은 목소리로 뭔가 이야기를
나누다가 가 버렸다. 나는 비에 젖은 벚꽃 아래서 담배를 처음으로 피워보았다.
우리는 한 우산 아래 있었다. 그녀가 가진 가느다란 박하향 담배를 받아 들고, 그녀의 라이터
(이 시대에는 라이터가 비쌈)로 불을 붙였다. 그녀는 어떻게 하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저 주의
깊게 바라볼 뿐이었다. 연기를 깊게 들이마셨더니 머리가 멍해졌다. 이런 장면에서는 흔히들
기침을 하지만, 어쩐지 기침은 나오지 않았다. 연기는 빗속으로 기묘한 무늬를 만들며 사라져
갔다.
날씨는 서늘하고, 축축하고, 주위는 어두웠지만, 빗소리를 들으며 '담배 놀이'를 한다는 건
멋진 일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멋진 것은 담배가 아니었다. 비 오는 날 공원의 벚꽃 아래, 그녀, 희미한
연기, 그런 것들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떨려 올 만큼 비밀스런 매력을 갖고 있었다.
비는 오랜만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빗속에 있었던 것이 오랜만이었던 것이다.
나지막히 중얼대며 내리는 비였다.
「담배는 어때?」
「머리가 멍해지는데. 처음이라 그런가?」
「아니, 원래 그런 것 같은데. 난 아직도 그러니까.」
「하지만, 그렇게 나쁘지는 않네.」
「추워.」
「추워?」
나는 반사적으로 그녀를 내 쪽으로 끌어 당겼다. 안아 버리는 자세가 되어 버렸다.
「이러고 있으니까 좋은데.」
그녀는 내 품으로 조금 더 파고들어서, 강아지처럼 내 목에 얼굴을 부볐다.
「귀여워, 누나. 강아지 같아.」
그녀는 내게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고, 비죽이 웃었다.
「따뜻해서 기분 좋아. 하지만.」
명백하게 동요하는 표정이었는데, 나는 그때 그 표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래?」
「나는, 최소한 나의 확대된 일부는, 불행하게 남아 있어야 해. 그래야 나는 글을 쓸수 있는
거야.」
모모는 나에게서 몸을 떼었다. 그리고 자기 우산을 펴 들고 걷기 시작했다.
「아, 가게요?」
그렇게 잠깐 동안 묵묵히 걸어가던 그녀는 갑자기 뭔가 생각 난 듯이 돌아와서, 자기 목도리를
풀어서 내게 둘러 주었다.
「나 오늘 바빠서 이만. 정말 즐거웠어. 안녕.」
나는 모모의 뒷모습이 아주 안 보이게 될 때까지 가만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빗속에서 뛰어서 집까지 돌아오는 길에 몇번이나 발을 헛디뎠다.
잘은 모르겠지만, 나는 아마도 모모를 사랑하고 있다.
나는 감정표현을 이 정도밖에 못하는 녀석이다.
심호흡을 하고 나는 공원 길을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뒤로 한 공원에서 어떤 남자의 긴 외침이 들려 왔다. '야하!'비슷한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듣고
있다 보니 어린 시절의 집 앞 놀이터가 생각났다. 석양이 비치는 창가 바닥에 엎드려서 방학
숙제를 하다 보면, 무슨 말일지 모를 아이들의 긴 외침이 들려 오곤 했던 것이다. 그것은 이름을
부르는 소리 같기도 했고, 놀이 중에 외치는 의미 없는 소리 같기도 했다.
석양속에서는 모두가 서로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내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았다.
오컬트 박물관의 우울
-엔딩송
그날 그 기분대로 내 인생이 지속되었더라면 나는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다시는 연락이 없었다.
나는 수소문해 보았지만, 생각해 보면 나는 그녀의 이름조차도 모르는 것이다.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오랜 시간을 헤맸다. 그녀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겨서가 아니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내게 담배를 건네 줄 때 이미 마음을 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불
안정한 그녀는 지나치게 많이 생각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좌뇌가 없는 나와 마음의 일부가
지나치게 확대되어 있는 모모, 우리는 수저 세트처럼 잘 어울렸던 것이다. 나는 불안정한
그녀를 꼭 잡아 줄 수 있었을 텐데. 춥고 어두운 곳을 헤메는 모모를 안아 줄 수 있었을 텐데.
나는 그녀를 찾아 헤메고는 있었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모모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나의 잘못도, 그녀의 잘못도 아니다.
모모는 뭔가와 깊이 연관 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맂도 모른다.
그렇게 내 모모는 없어졌다. 내 앞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나의 스묾은 그저 그런 성적과 항상 품고 있던 일말의 기대와 함께, 막을 내렸다.
그리고 나는 전혀 예정에 없던 국군정보부에 다시 들어가게 되었다.
서른살은 외로운 것이다. 나는 아직도 간혹 나오는 문예 잡지를 빠짐없이 뒤적거린다. 모모의
이름은 모르지만, 나는 분명히 그녀의 소설을 알아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녀의
소설은 실리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서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그녀는 어딘가
도마뱀들이 지켜보고 있는 어두운 곳에서 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 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옛 시대에나 있을 법한 일이지만, 그녀가 죽고 나서 그녀의 원고가 발견되고, 그녀는 죽은 후에
대작가가 되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녀는 그럴 자격이 있다. 하지만 서른 한살의
모모가 내 옆에 있다면, 서른 살의 나는 외롭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을텐데.
오늘은 서점에서 이번 달의 신간 문예 잡지를 전부 샀다. 집으로 돌아가는 전동차를 타려고
역으로 들어간다. 고개를 빠끔히 내밀어 선로를 들여다본다.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은 저 어둡고
외로운 통로의 무섭도록 거대한 양감을 싣고 온다. 저 안에서는 불길한 도마뱀들이 지나온 길
마다 불길한 체액을 남기면서 가만히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찌잉'하고 귀가
아팠다. 그 옛날의 여학생들의 웃음기 섞인 비명소리가 다시 외치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과정을
거쳐서 이제야 원래의 소리로 환원된 것이다.
그들은 나를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거짓말이야.'라고 쾌활하게 외치는 모모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내가 이제까지 살아온 세상은 고작해야 빅 대디. 그렇다면 2리터도 안 된다. 나는 그 안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진짜 세상은 2리터보다는 훨씬 더 넒을 것이다.
하지만, 뭐, 좋다. 그 정도면 충분히 상대해 줄 수 있다.
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낡은 목도리의 한쪽을 힘차게 목 옆으로 넘긴 다음, 전동차
계단을 가볍게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세상 속으로 걸어 나갔다.
오늘은 밤을 세더라도, 집까지 걸어가는 것이다. 그 정도는 가볍게 걸을 수 있다.
요컨데 나의 인생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오컬트 박물관에서 만난 우울인 것이다. 모모는
그 기분좋은 우울과 함께 오고, 우울감이 가기 전에 없어졌다.
모모는 내 유일한 강아지이다. 내 멋대로 정해 버린 거지만, 다른 강아지를 귀여워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요즘 시대에는 아무도 그런 생각을 안 하는 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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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그러니까 고등학생때 쓴건데
판갈에도 한번 올려봅니다 ^^;